<10화>
‘엥? 잘못해서 부른 게 아니라고? 그럼 수업 때문인가? 근데 저번에 디칼은 분명 잘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디칼은 저번 문장 구조 시간 때 내게 제국어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제국어를 배우는 시기가 꽤나 늦었는데도 문장 구조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며 감탄했지.
‘조금 자랑 같긴 하지만.’
내가 습득력이 빠른 건 사실이니까.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많이 봤을 그가 내게 빈말로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닐 거다.
그는 귀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에 내가 골똘히 고민하는 사이 헤이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녜.”
“왜 그랬지?”
그 일 때문인 건 맞나 보네.
헤이녹스는 내게 왜 큰소리를 냈는지 묻고 있었다. 언뜻 들으면 꾸짖는 것처럼도, 걱정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에이 설마.’
물론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까.
아직까지 프리실라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헤이녹스는 여전히 매사에 무심했다.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그가 전장으로 떠난 건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니까 아직까지 나를 보면 불편할 수도 있어.
“아! 져, 그게 왜 그랬냐믄여…….”
‘뭐라고 해야 하지? 렌자드가 시비를 걸었다고? 걔가 먼저 공작 부인을 모욕했다고?’
하지만 난 렌자드가 공작 부인을 모욕했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 몸도 어려서 동화되는지 종종 유치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렌자드도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고 나쁜 의도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닐 테니까.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어쨌든 헤이녹스 앞에선 약한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는 동시에 반성하는 태도까지 보여야 했다.
‘뭐라고 하지!’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뭐라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마땅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질 않았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렸다.
“렌쟈드가 제 애플파이를 탐내써여!”
“……뭐라?”
망할.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역시나 헤이녹스는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렌자드가…… 네 애플파이를 탐냈다고?”
“……녜.”
“그래서 싸웠단 말이지?”
“……녜.”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렌자드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푸이치와 즐겁게 하하 호호하며 간식 타임을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시작은 렌자드가 애플파이를 먹고 있는 내게 시비를 건 게 맞았다.
“하…… 탄제리크가를 혼란스럽게 이유가 고작 애플파이 때문이라고.”
‘고작 애플파이?’
자연스레 그 맛을 떠올리고 있는데 헤이녹스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헤이녹스가 저렇게 애플파이를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푸이치의 솜씨를 잘 몰라서가 틀림없다.
만약 그가 한 번이라도 푸이치의 디저트를 맛보았다면 절대 저렇게 가볍게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좀 이상한데 부분에 꽂힌 것 같긴 하지만 사실인걸!’
푸이치는 대단한 요리사였다. 며칠간 먹은 디저트는 하나같이 천상의 맛이었으니까.
처음 록시나에 빙의했을 때보다 훨씬 오동통해진 볼이 그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헤이녹스는 여전히 나의 말에 납득할 수 없는 듯했다.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가? 렌자드가 애플파이를 빼앗아 먹어 싸운 것이라고?”
그것뿐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애플파이는 구실일 뿐 ‘렌자드는 그저 프리실라를 죽인 내가 즐거워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시비를 걸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나는 헤이녹스의 앞에서 프리실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는 입장이다.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공작 부인. 그리고 그 그리움이 가장 클 헤이녹스.
그는 원작의 록시나가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프리실라를 그리워했다.
‘그런데 아내를 잃은 지 4년밖에 안 된 지금 시기의 헤이녹스에게 프리실라 얘기를 꺼냈다간…….’
그대로 저택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그럴 것이다.
내가 프리실라의 죽음에 관해 의문을 던진 건 렌자드도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있어야 이후 사건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까 봐서였지, 이 일이 성급하게 헤이녹스의 귀에 들어가길 바란 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공작 부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무리야.’
그리고 이런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아직까지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내 부탁을 들어주던 날, 헤이녹스가 웃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어쨌든, 지금 가족이니까.’
부모도, 먼 친척 하나 없는 내게 처음으로 생긴 가족.
애착을 갖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애틋함까진 아니지만, 모든 일이 밝혀지고 나면 나도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이상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옛날에 내가 그랬듯.
미련한 생각인가 싶어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헤이녹스는 눈앞의 록시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 것인지, 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건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헤이녹스는 아이를 위로하는 방법을 몰랐다.
렌자드와 체드만를 달래는 건 언제나 프리실라의 몫이었고, 그가 아는 훈육이라곤 강하게 주의를 하는 것뿐이었다.
엄격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면 렌자드와 체드만은 울먹이면서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설령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프리실라가 안아 주면 삐친 것이 금방 풀리곤 했다.
하지만 록시나는 둘과 상황이 달랐다. 아이의 곁엔 더 이상 프리실라가 없었고, 헤이녹스는 여전히 서툴렀다.
‘딸은 뭐라고 위로해야 하는 거지? 안아 주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불행하게도 헤이녹스는 아이 다루는 방법을 몰랐고, 어쩔 줄 모를수록 표정이 굳거나 목소리가 낮아지는 습관이 있었다.
때문에 헤이녹스는 생각과는 달리 록시나를 다그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바른대로 말하거라. 거짓을 말하면 너를 벌할 것이다.”
‘벌?’
나는 헤이녹스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벌한다니?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는 꾹꾹 눌러 온 내 감정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저눈, 저눈 사실대로 말해써여. 렌쟈드가 먼져 화를 냈꼬, 저도 화가 나서 그론 거에여.”
떠올릴수록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렌쟈드가 그래서, 푸이치랑 앤도 있눈데 그래서, 저눈 가만히 있기가 시러서…….”
헤이녹스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크게 흔들리는 게 보였지만 내게 그를 배려할 마음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이고 싶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에게 벌이라니.
“제가 어떠케 해써야 하나여? 평소처럼 입 다물고 이써야 해떤 건가여?”
“그런 의미가 아니라…….”
헤이녹스의 말은 내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으로만 들렸다.
그것도 한참 뒤늦은, 누군가는 후회라고 부르는 것.
‘헤이녹스에게 난 어떤 존재지?’
정말 지금 아내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면 그는 어떤 마음일까.
비참했다.
“졔송해여. 제가 너무 무례해써여. 정말 제송함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고 나는 이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저눈 사실대로 말해써여. 거짓말은 한 번두 안 해써여, 정말루여.”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인지 헤이녹스에게는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는 꽤나 긴 정적이 이어졌다.
헤이녹스는 선뜻 말을 꺼냈지 않았고 나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고민하는 듯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헤이녹스가 말문을 열었다.
“프리실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
울컥이는 감정으로 요동쳤던 마음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지금, 프리실라 이야기를 꺼냈어. 내 앞에서, 직접.
나는 예상치 못한 헤이녹스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할 수 있는 답은 많지 않았다.
그쪽이 화낼까 봐요, 라고 답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것 때문은 아니어써여.”
‘사실 맞지만.’
나로서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내 대답에 헤이녹스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다 알고 있었어. 내가 프리실라 이야기를 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는 나에게 진실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반성을 바라는 것일 테고. 방금 전 죄송하다고까지 말했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헤이녹스는 나의 말을 곱씹듯 말끝을 늘렸다. 그리고 나를 한참이나 꿰뚫어 보듯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만 가 봐도 좋다.”
‘어?’
빨리 끝내고자 하는 마음이 큰 건 맞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보내 줄 줄은 몰랐다.
“정말 나가 봐두 댈까요?”
“그래.”
“구럼 가 보께여…….”
내가 막 문을 열려 하자 뒤에서 헤이녹스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수업 끝나고 오는 거 잊지 말거라.”
“녜.”
걸음을 빨리해 집무실을 나선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내일 오는 것 잊지 말라고 하는 말투가, 평소보다 조금은 다정한 것 같았다.
집무실을 나와 멍하게 서 있자 앤이 잽싸게 다가왔다.
“아가씨! 별일 없으셨나요? 오랫동안 안 나오셔서 걱정했어요.”
나는 요란하지만 걱정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한 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걱졍 마. 아무 일도 업써서.”
“그럼 다행이지만요…….”
앤은 여전히 안심하지 못한 듯 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는 익숙지 않은 타인의 걱정이 왠지 간지러워 얼굴을 붉히며 발길을 재촉했다.
“어, 어서 가쟈! 나 애플파이 마저 먹고 시퍼.”
“아가씨, 같이 가요!”
나는 나를 따라오는 앤의 발소리가 들리자 부러 더 빨리 걸었다.
“빨리 와!”
“아가씨!”
기다란 복도에는 나의 짓궂은 웃음소리와 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으응…….”
나는 문밖으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적거리며 대답하자, 방 안으로 앤이 들어왔다.
“앤?”
앤은 내가 잠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오후가 되도록 자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아직 아침인 고 가튼데…….”
해가 아직 저렇게 낮게 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나를 깨울 시간은 아니었다.
창밖이 아직 밝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누우려 하자 앤이 빠르게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안 돼요, 아가씨!”
“왜애애…….”
내가 피곤함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자 앤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이랑 아침 식사 하셔야지요.”
“공쟉님이랑 무슨 아침 식사를 가치…….”
‘엇!’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
“아침 식사!”
렌자드와 다툰 이후 처음으로 헤이녹스에게 수업 보고를 하러 갔을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내일부터 아침 식사를 함께할 것.’
그와 함께 덧붙인 이유는 더 황당했다.
자신은 바쁘니 아침 식사가 아니면 온 가족이 모일 일이 없다는 논리였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다.
이제까지 록시나를 방치한 게 누군데?
나는 어이없음을 한껏 담아 헤이녹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할 말 다했으니 나가 보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흑……. 도대체 왜 이로는 고야…….”
그날 자신을 추궁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쨔증 나…….”
내가 주먹을 꽉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앤이 나를 설득하듯 달래며 말했다.
“공작님께선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그러신 거예요. 아가씨도 공작님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으세요?”
“아냐.”
앤. 네가 아직 뭘 잘 모르는 거 같은데, 헤이녹스는 딸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부르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기 시러…….”
“어서 일어나세요. 공작님은 벌써 식당에 와 계실 텐데 얼른 준비해야죠.”
“흑…….”
나는 앤의 손에 이끌려 침대를 벗어났다.
앤은 액체처럼 자꾸만 바닥으로 퍼지는 나를 붙잡아 의자에 앉힌 후 머리를 빗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머가?”
앤은 내 엉킨 머리칼을 풀며 대답했다.
“조금 걱정했었거든요. 전장에서 돌아오신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모른 척하실까 봐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거울 속으로 비치는 앤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를 미워하실까 봐, 속으로 조마조마했어요.”
“……왜?”
내가 조심스레 묻자 앤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야…… 아가씨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언뜻 보이는 앤의 미소는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 과거에 한 장면을 더듬는 것처럼.
“아가씨는 요즘 많이 변하셨죠.”
‘……!’
나는 앤이 록시나의 영혼이 바뀐 걸 눈치챘나 싶어 깜짝 놀랐다.
내가 어깨를 움찔거리고 불안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앤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잘못하셨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밝아진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예전에는 말도 잘 안 하시고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셨잖아요.”
“……앤은 지굼이 더 조아?”
내가 조심스레 묻자 앤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예전의 아가씨도, 지금의 아가씨도 좋아요. 어떻든 전부 아가씨인걸요.”
“…….”
“하지만 아가씨가 지금처럼 계속 밝고 당찬 모습으로, 죄책감에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응.”
앤은 내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 공작님과 식사도 함께하셔야죠! 고개를 위로 높게 치켜드시고요. 아가씨는 프리실라 님의 마지막 선물이니까요.”
‘선물…….’
어느덧 준비를 마친 앤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요. 아가씨.”
나는 앤의 손을 잠시 쳐다보다 손을 뻗었다.
“응.”
가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