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그 시각 체드만은 연무장에 있었다. 그가 훈련하는 모습을 본 사용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훈련하는 그를 향해 독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체드만이 검을 좋아한 이유는 휘두를 때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인데, 오늘 검을 휘두르는 그의 머릿속은 시장터처럼 시끄러웠다.
‘록시나…….’
체드만은 얼마 전부터 막냇동생이 무척이나 수상했다. 방에 숨어 남의 눈치만 보던 동생이 고개를 치켜들고 렌자드에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록시나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분명 이렇게 당찬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록시나는 늘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렌자드가 선을 넘은 말을 할 때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전의 록시나는…….’
렌자드가 하는 말에 또박또박 반박했다. 그것도 네 살짜리가 알 리가 없는 비겁하다는 말까지 해 가며.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
물론 록시나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머니가 죽은 건 록시나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 정도는 체드만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렌자드에게 경고를 했던 거다.
물론 그 이상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그나저나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신전이라…….’
그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은 언제나 청렴하고 순수해야 했고, 누구나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록시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날 왜 아버지는 신관을 부르지 않았을까?’
체드만이 아는 헤이녹스라면 영지를 팔아서라도 신관을 데려왔을 거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던 그날, 탄제리크가에서는 신전은커녕 하얀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습 신관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과다하게 나오는 피와 정상 범주를 넘어선 체온을 내리는 건 신성력을 조금만 사용해도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움직이지 않은 탓에 탄제리크 공작 부인은 그런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체드만은 훈련 중 물을 마시는 도중에도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죽은 것이 단순 산후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의 생각에 신전에게는 탄제리크가를 도와 줄 의무가 있었다. 돈을 얼마를 받기로 했든 그들의 우선순위에는 탄제리크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기부하신 게 얼만데…….”
체드만과 렌자드, 록시나를 낳은 전 공작 부인 프리실라 탄제리크는 살아생전 신전에 매년 9월마다 막대한 돈을 기부했다.
아무리 신앙심 때문이라도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어 어린 체드만이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프리실라는 이렇게 답했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위험에 처한다면, 신전은 우리를 가장 먼저 도울 거란다.’
프리실라가 대저택 두 채는 거뜬히 마련할 값을 매년 기부한 것은 온전히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전은 그런 그녀의 정성을 알면서도 외면한 것이다.
“개자식들…….”
체드만의 입에서 순진한 얼굴과는 맞지 않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신전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내가 여태껏 신전을 의심하지 않았다니.’
만약 록시나가 오늘 말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을 일이었다.
체드만은 자꾸만 피어오르는 분노에 내동댕이친 검을 다시 들어 거칠게 휘둘렀다.
* * *
주방에서의 소란으로 렌자드와 체드만이 헤이녹스에게 불려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나대로 걱정이었다.
‘이번 일로 제대로 찍힌 것 같은데…….’
이 집안의 실세는 헤이녹스. 그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 나와 렌자드의 소란도 무척이나 안 좋게 보았을 게 분명했다.
‘망할 렌자드 때문에 이게 다 뭐야?’
프리실라의 죽음을 밝히고 이 저택에서 안온한 생활을 누리기로 했던 계획이 시작부터 엉망이 되었다.
나는 아득바득 우기던 렌자드의 모습이 생각나 이를 갈았다.
“렌쟈드……. 하여간 내 인생에 도우미 앙 대.”
“아가씨이…….”
앤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안절부절못했다.
“갠차나. 어차피 내 방엔 렌쟈드 말구는 아무도 앙…….”
똑똑-
“공녀님, 안에 계십니까.”
오잖아?
“누구세, 아 시녀장님!”
앤이 문을 열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앤이구나. 공녀님은 안에 계시니?”
“나 여기써.”
내가 손에 묻은 쿠키 가루를 쪽쪽 빨며 다가가자, 시녀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이도 많은데 이런 꼬맹이한테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시녀장도 고생이 많구나.’
내가 측은한 마음에 안쓰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와써?”
그리고 이어 들린 말에 난 더 이상 그녀가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체드만과 렌자드를 부르고 나서도 호출이 없길래 나는 부르지 않을 건가 보다 싶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소란의 원인은 내가 아니지만 어쨌든 소란의 당사자긴 하니까.
“아가씨?”
의아한 듯 나를 부르는 시녀장의 온화해 보이는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지옥의 사신처럼 보였다.
“앙 대…….”
나도 당사자니 부르는 게 맞긴 하지만,
“가기 시른 걸 어떠케 하라고…….”
나는 이성과 따로 노는 심정과 함께 죽을상으로 시녀장의 뒤를 따랐다.
‘우리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야…….’
이 긴 복도가 오늘따라 어찌나 짧게 느껴지는지. 소란을 알고 있는 사용인들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흑. 그렇게 안 봐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고…….’
시녀장의 발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나는 금세 헤이녹스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공작님. 공녀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여라.”
“공녀님, 들어가시지요.”
그러곤 시녀장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벽 앞에 서 가만히 대기했다.
“후…….”
나는 떨리는 마음에 잠시 심호흡을 하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왔군.”
웃는 낯의 헤이녹스였다.
“아, 안농하세여…….”
‘엄마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굴렸다.
‘왜 웃고 있는 거야 불안하게…….’
나는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심지어 나는 꿀릴 것도 없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당당하게 나가는 거야!
나는 작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헤이녹스는 다시 평소의 그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금방 눈을 내리깔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자 헤이녹스가 크게 한숨 쉬듯 말했다.
“일단 앉거라.”
“녜…….”
소파는 내게 여전히 높았지만 평소처럼 투덜거릴 순 없었다.
나는 엄연히 죽은 공작 부인을 모욕하는 발언에 맞섰을 뿐이지만 저택에서 큰 소란을 만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차라리 소파가 더 높았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아무리 힘을 써도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면 올라가기 위해 끙끙대다 힘이 빠진 척 연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헤이녹스도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자며 방에 가라 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올라가지 못하는 척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소파를 등반한 경험이 몇 차례나 있었고, 헤이녹스는 나의 그런 얕은수를 모를 만큼 허술하지 않으니까.
나는 너무 열심히 소파를 올랐던 과거의 나를 질책하며 시트를 꽉 잡았다.
헤이녹스는 내가 짧은 두 다리로 버둥거리며 소파 위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록시나.”
“녜?”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나?”
“녜…….”
“뭐 때문이지?”
“제, 제가 잘모태서여…….”
“…….”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헤이녹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화가 났나 봐.’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오만가지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혼을 내려고 부른 거겠지? 소란 피운 것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나이 많은 오빠한테 대들었다고 꾸짖을지도 몰라.’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든 무관심한 헤이녹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한 가문의 가주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가문을 철저히 통제했고, 냉정한 주인과 선을 철저히 지키는 사용인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원작에서도 냉철한 주인의 표본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정해 둔 규율 아래서 움직이는 저택은 가문의 명망을 높이는 요소였다.
‘그런데 내가 그 저택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지.’
그렇게 생각하자 방 밖으로 나오면서 사용인들과 친해진 상황이 어찌 보면 마냥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설마, 때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살금살금 그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근신?’
나는 내가 한 가정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절대 안 돼!’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디칼에게 가르침을 받아 제국어를 떼고, 푸이치의 애플파이도 먹고, 앤과 산책도 하고…….
또 나중엔 신전에 들러 비밀을 밝히고, 광산을 찾아 탄제리크에 도움이 되어야 하니까.
이는 아직 먼 미래기 때문에 우선은 렌자드와 체드만과의 관계를 풀어 둘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다급해지는 마음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싫은 티를 내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법.
헤이녹스는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빠르기 때문에 안면근육에 조금만 움직임이 있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긴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내가 한참을 그러고 있자 헤이녹스는 깊게 한숨 쉬듯 말했다.
“고개 들거라, 록시나.”
“녜, 녜에.”
‘후우…….’
다행히도 헤이녹스는 그리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착잡해 보인달까.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나는 네가 잘못해서 부른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