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앤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뭐가?”
언뜻 태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내 태도에 앤이 입술을 짓씹었다.
“아까……. 도련님께서 하신 말씀에 아니라고 하지 못한 거요.”
“내가 공쟉 부인을 주겼다는 거?”
에둘러 말하는 앤에게 내가 직설적으로 되묻자 그녀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이어지는 정적에 앤이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저는 정말로 아가씨가 마님을 죽였…… 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갠차나.”
“네?”
앤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
“갠찬타고.”
나는 앤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사과하지 아나도 대.”
“아가씨, 저는 감히 아가씨를 욕보였어요. 그런데 어째서…….”
“앤이 거기서 어떠케 아니라고 할 수 이께써.”
내가 앤에게 괜찮다고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일개 고용인일 뿐인 앤이 공작가의 차남에게 함부로 대들 수는 없었을 거다.
물론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정말로 앤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내가 앤이라도 나서지 못했을 테니까.
“앤은 어쩔 수 업썻자나.”
“아가씨…….”
나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앤에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 애플파이 다 못 머겄는데.”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가지고 올게요!”
“웅.”
탁-
앤이 나가자, 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늘의 렌자드와의 갈등에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믿음도 권력 앞에선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말이지.’
앤이 나를 두둔하지 않아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비현실적인 광경을 인정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앤이 잘 챙겨 준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그다음은 앞으로도 이 소설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쫓겨나도 먹고살 수 있을 만한 자금줄을 쥐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은…….’
앤과 함께 이 저택에서 계속 지내고 싶어.
푸이치의 애플파이를 먹고, 디칼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는 목표를 수정하기로 했다.
그전엔 단순히 헤이녹스의 눈에 들어 자금줄을 쥐기 위해 저택 내에서의 입지를 다져야겠다, 정도였다면 이제는 원작처럼 탄제리크의 균열을 막기 위해 내 자리를 공고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진실을 밝혀야 해.’
탄제리크는 프리실라의 죽음을 시작으로 한 누군가의 장난질 때문에 이미 위기를 겪고 있다.
그 때문에 헤이녹스는 전장을 떠돌고, 체드만은 모든 일에 무관심한 태도로 체념했으며, 렌자드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꿎은 대상에게 화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공작 부인을 죽였다는 오명을 쓴 록시나 역시 성격파탄자 악녀로 자라겠지.
누군가의 수작에 철저히 놀아나는 결과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막을 수도 있을 거다.
이 일의 시작인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 게 이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마음대로 하게 둘 순 없어.’
* * *
한편, 헤이녹스의 집무실에는 한겨울보다도 더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큰 소란이 있었다지.”
“죄송해요…….”
헤이녹스는 별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물음에도 느껴지는 노기에 렌자드가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죄송하단 말 따위나 듣자고 널 부른 게 아니다.”
“아, 아버지 그게…….”
“제가 말하겠습니다.”
소란이 일고 헤이녹스가 렌자드를 불렀다는 얘기를 듣자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다며 찾아온 체드만이 입을 열었다.
“나는 렌자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헤이녹스는 이미 집사에게 모든 상황을 들은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자드를 부른 이유는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훈련이 끝나고 복도를 지나가던 중에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났습니다.”
손에 땀이 나는지 바지에 몇 번 문지른 렌자드가 말을 이었다.
“식사 때가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싶어 식당 문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애가 애플파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렌자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고…….”
그러곤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자 헤이녹스가 알만 하다는 듯 혀를 찼다.
“결국 모든 소란의 시작은 너였다는 거로군.”
“죄송합니다…….”
헤이녹스는 렌자드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을 바라보다 가만히 서 있는 체드만에게 물었다.
“렌자드의 말이 맞나?”
“예, 맞습니다.”
“다른 얘기는?”
순간 체드만의 머릿속에 록시나의 분노 어린 외침이 떠올랐지만 차마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다.
“……없었습니다.”
헤이녹스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렇단 말이지…….”
헤이녹스에게는 찰나의, 렌자드와 체드만에게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규칙적이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가 보거라.”
“네.”
“네, 아버지.”
* * *
“거짓말을 하는군.”
체드만과 렌자드를 돌려보낸 헤이녹스는 집무실에 혼자 남아 좀 전의 일을 상기했다.
자초지종에 대해 다 알고 있지만 부른 이유는 듣고자 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아들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다.
사실 체드만과 렌자드가 그 일들을 숨긴 것이 이해는 갔다. 그 자리에 있었던 둘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크게 당황했을 테니까.
하지만 헤이녹스는 탄제리크 공작가의 가주.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일 중 그가 모르는 일은 없었고, 없어야만 했다.
“모를 거라 생각하고 숨긴 건 아닐 테고…….”
렌자드는 단순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 그렇다 쳐도 체드만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숨긴다고 숨겨질 내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끝내 헤이녹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신전이라…….”
집사의 보고에 따르면 록시나는 프리실라의 죽음이 신전 때문이라고 렌자드에게 말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헤이녹스의 눈이 깊어졌다.
신전이 프리실라의 죽음에 일조한 것은 맞다.
프리실라가 죽어 가던 그날, 수차례 신전으로 보낸 전서에 돌아온 답은 없었으니.
만약 신전에서 제때 저택으로 찾아왔다면 프리실라가 그리 허망하게 떠날 리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저택 내에서, 그것도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저택에 입을 가벼이 놀리는 멍청이가 있는 모양이군.”
누군가 제 주제도 모른 채 록시나의 앞에서 함부로 프리실라의 죽음에 대해 떠들어 댄 게 분명했다.
“록시나. 록시나 탄제리크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낯선 이름은 프리실라와 헤이녹스 사이에서 낳은 마지막 아이였다.
마지막 아이. 그랬다.
처음 체드만을 품에 안았을 땐, 행복했던 것 같다. 프리실라를 똑 닮은 그 모습은 어쩐지 그녀가 작아진 것만 같았으니까.
렌자드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프리실라를 닮은 초록 눈에 검은 머리칼. 우리가 부부임을 증명하는 생김새에 조금은 즐거웠다.
그리고 그녀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로 그에게 전한 아이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거짓말처럼 프리실라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당신은 좋다고 웃었다.
프리실라는 이마에 눌어붙은 머리칼은 뗄 생각도 않고 말했다.
‘당신을, 닮았어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참 말갛게도 웃으면서.
‘우리 아이, 행복하게 해 줘요. 아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
그리고 프리실라는 숨을 거두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게 프리실라의 유언이었다. 그리고 헤이녹스는 그중 무엇도 지키지 못했고.
록시나. 그 아이가 미운 건 아니었다.
프리실라를 보내고, 몇 달간, 그녀의 뜻대로 아껴 보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프리실라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온전히 저만 닮은 아이에게서 헤이녹스는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프리실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아이에게 덧씌워지는 느낌.
이대로 지내다간 록시나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헤이녹스는 그 감정을 깨닫자 곧바로 전장으로 떠났다.
아이를 사랑하진 못해도,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고 싶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떠난 전장에서 돌아오니 아이는 어느덧 네 살이 되어있었다.
홀로 걸을 줄도, 말할 줄도 알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아이가 움직이는 걸 보자 그제야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저를 버리고 떠난 아비를 마음껏 원망해 보라고 부러 기분이 나쁠 말만 골라서 했다.
머리가 부딪쳐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찾아가야 할지 말지를 한참 고민했다.
아이는 누가 봐도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잠든 록시나의 머리칼을 쓸어 주고 말았다.
한밤중이라면 왔다 간 줄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당신과 조금 닮았는지도.’
선생님을 달라고 요구하던 모습과 집사에게 들은 당돌함.
작은 몸으로 렌자드를 향해 소리쳤을 그 모습을 떠올리니 입가에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하…….”
“고, 공자님.”
렌자드의 방을 정리 중이던 시녀는 그의 한숨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청소는 됐으니까 나가 봐.”
“네, 네!”
먼지떨이를 든 시녀까지 내보낸 뒤 렌자드는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내가 비겁하다고……?”
렌자드는 아까 전 록시나가 그에게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때 공쟉 부인을 도울 수 있능 건 신전바께 업서써. 너도, 나도 아닌 공쟉님도 아닌 신전.’
“잘못한 게 신전이라고…….”
어머니가 죽은 건 저택에 오지 않은 신전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해.’
신관을 저택으로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한 번 부르는 데 저택 한 채 값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녹스가 그런 이유로 신관을 부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꼈으니까.
“그럼 대체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록시나는,
‘신전에 대해 어떻게 안 걸까.’
렌자드의 머릿속이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