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국어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단어 읽는 법과 조합하는 법까지 진도를 나가고, 성조는 시간을 봐서 결정하겠습니다.”
간단히 수업 계획을 말하며 디칼이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꺼낸 물건은 글자가 쓰여 있는 하얀색 종이 뭉치였다.
“이게 머에여?”
“제가 만든 단어 카드입니다. 아무래도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은 배우시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실 것 같아 간단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정식 교재는 시간이 촉박해 들고 오지는 못했지만 완성되는 대로 저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우와…….”
디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학생을 위해서 직접 책도 만들어 주네.’
물론 헤이녹스에게 넉넉한 수당을 받기야 하겠지만,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디칼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에게 애정을 가지는 건 아주 좋은 일이지.’
나는 그 정성이 갸륵하다는 듯 디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공녀님?”
디칼이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했다.
“구냥. 기특해서여.”
“기특…… 이요?”
“웅. 성생님 아주 기특해여.”
“어…….”
디칼은 네 살짜리에게 기특하다는 말을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
‘칭찬인가?’
칭찬인지 장난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 갔지만 그의 답을 들을 때까지 어깨를 두드리는 조그만 손이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얼떨결에 답했다.
“감사합니다.”
“멀여.”
“그럼 기본적인 철자와 읽는 방법부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먼저 ‘t’는 혀끝을 천장에 대었다가 떼면서 ‘뜨어’ 하고 발음하시면 됩니다.”
“트어.”
“혀를 조금 더 굴리셔야 합니다. ‘뜨어’ 이렇게요.”
“트어.”
“조금만 더…….”
“트어.”
‘혀가 짧아서 그런가?’
디칼이 들려주는 발음을 따라 하기가 어려웠다. 디칼도 그 사실을 아는지 괜찮다며 날 위로했다.
“이 단어는 유난히 발음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제국어를 배우는 다른 영애, 영식들께서도 힘들어하시는 것이니 너무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말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아니, 내가 아무리 어려졌대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다고?’
그건 옹알이한 지가 이십 년이 넘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이거 발음하고야 만다.’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잠시 식었던 열정이 다시 불타올랐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상 성조는 다음 시간에 나가겠습니다.”
“성생님!”
나는 디칼이 그대로 방을 나가려 하자 재빨리 그의 소매를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질문하실 거라도…….”
“아녀. 그게 아니라 애플파이 먹고 가라구여!”
“예?”
역시 내 넓은 아량에 감동한 게 분명했다.
‘나도 처음 먹어 보는데 나눠 주는 거라고.’
“아,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디칼은 아쉽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거절했다.
“그러쿠나!”
‘휴. 다행.’
사실 디칼에게 예의상 권하고 나서도 조금 후회했다.
‘디칼이 다 먹어 버리면 어떻게 해!’
디칼은 기사만큼이나 몸집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넝히 가세여!”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듯 인사하고 디칼보다도 빠르게 방에서 나왔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앤이 잔뜩 흥분해 뛰어나오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끝나신 거예요?”
“웅! 얼릉. 얼릉 가쟈!”
“네, 아가씨.”
* * *
“아 좋은 냄새……!”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타르트지의 냄새가 풍겼다.
“푸이치! 다 됐어?”
“아가씨? 왜 방에 안 계시고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오븐 속에서 타르트가 구워져 가는 걸 보고 있던 푸이치가 별안간 들리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물었다.
“푸이치 보려고 와찌!”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하지만 푸이치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잔뜩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공녀님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으응.”
나는 생각보다 과격한 그의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푸이치의 뒤에서 구워져 가는 타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런 나의 시선을 느낀 건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타르트는 금방 완성될 겁니다. 테이블에 가서 앉아 계시면 조금 식히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라써.”
나는 미련이 뚝뚝 남은 눈으로 타르트를 바라보다 앤의 손에 이끌려 주방에서 나갔다.
“엉제 다 돼?”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거에요.”
앤의 추측성 짙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다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앤. 파이는 엉제…….”
“아가씨.”
“아라써. 기다리묜 대자나.”
‘수업이 끝나면 바로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기다려야 할 줄 알았다면 성조까지 배우고 올 걸 그랬다.
‘아, 그럼 수업 시간 끝났다고 추가 수당 달라고 했으려나?’
하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돈을 내는 건 헤이녹스지 내가 아니니까.
디칼은 내 수업료로 얼마나 받을까와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푸이치가 파이를 가지고 주방에서 나왔다.
“오! 오오!”
“충분히 식혔으니 드시는 데에 무리는 없으실 겁니다.”
내 몸에 맞추어 주문 제작한 작은 포크를 들고 파이를 가르니, 속에서 찐득한 잼이 흘러나왔다. 나는 파이 가장자리를 잘라 잼을 듬뿍 묻혀 한입에 넣었다.
“합!”
‘이, 이 맛은!’
바삭한 타르트지의 고소함과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사과 절임. 그리고 삼키기 직전 잠깐 느껴지는 계피 향까지.
이 애플파이는 한 마디로,
“체고야!”
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파이를 음미하자, 푸이치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너무너무 마시써! 푸이치 짱!”
“감사합니다. 허헛…….”
그때 식당의 화기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렌자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푸이치. 복도를 지나가는데 웬 달콤한 냄새가…….”
렌자드는 포크를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곤 얼굴을 팍 찌푸렸다.
“뭐야 저건? 쟤가 왜 여기 있어?”
그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반응에 푸이치가 땀을 뻘뻘 흘렸다.
“아, 그것이. 제가 구운 애플파이를 공녀님께서 드시던 중이었습니다.”
“애플파이? 왜 나한테는 구웠다고 말 안 했어?”
‘참나. 푸이치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하냐? 내가 부탁한 건데.’
렌자드의 억지에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치며 파이를 마저 먹었다.
아니. 마저 먹으려고 했다. 렌자드가 내 포크를 빼앗아가기 전까진.
“머 하는 거야!”
렌자드는 나의 작고 소중한 포크를 들곤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실소를 흘렸다.
“이 형편없는 건 용도가 뭐야?”
“내놔!”
“뭐야. 설마 네 포크야?”
내 분노에 찬 얼굴에 결국 렌자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물건도 제 주인을 닮나 봐! 푸이치. 이것 좀 봐. 이걸로 음식을 집을 수나 있을까?”
졸지에 나와 렌자드의 집중을 받게 된 푸이치는 어색하게 수염만 긁적거렸다.
“내놓으라고 해써.”
“내놓으라고 했으면. 그랬으면 어쩔 건데?”
렌자드는 작지만 날카로운 포크를 들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방에만 있으란 말 벌써 잊었어? 여기서 널 반기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돌아다니는 건지.”
혀를 차며 말을 한 렌자드가 얼어붙어 있는 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거기 너.”
“네?”
앤은 자신을 부를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뭐, 뭘 말씀하시는 건지…….”
“왜 이래?”
고개를 푹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는 앤에게 렌자드가 점점 다가갔다.
“저런 애 비위 맞추는 거 짜증 나잖아?”
“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
그때 렌자드가 앤의 귀에 대고 말했다.
“프리실라 탄제리크.”
그 그리운 이름에 앤이 멈칫했다. 그걸 놓치지 않고 렌자드가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가 죽었잖아. 저딴 거 하나 때문에.”
렌자드는 앤에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이 식당 안에서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말이 렌자드의 입을 통해 나오자,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도, 도련님.”
렌자드를 따라 들어온 시종은 사색이 되어 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만 방으로 돌아가심이…….”
“네 이름이 뭐지?”
렌자드는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시종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앤에게 물었다.
“애, 앤입니다.”
“그래, 앤. 내가 기회를 줄게.”
“무, 무슨…….”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아버지께 널 다른 곳으로 배치해 달라고 하겠어.”
“저는 원하지 않습니…….”
“너, 우리 어머니 존경했잖아?”
앤은 렌자드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전부 쟤 탓이란 것도 알 거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차분한 속과는 달리 작은 몸은 잘게 떨렸다.
“어쩌냐, 록시나. 네 시녀도 너를 원망하고 있는 거 같은데?”
렌자드의 이죽거림에 앤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이제 알겠어? 네가 어떤 존재인지.”
원작에서 공작 부인의 죽음이 공작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원작과는 다르게 내가 방에만 있지 않음으로 인해 저택의 사용인들은 록시나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실은 록시나를 생각만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희망이 보이는 거다.
원작 속 록시나가 그렇게 망가진 이유인 외로움이 사라지면, 악녀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평범한 성품을 가진 록시나가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겐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기는 거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모두가 공작 부인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아야 하지.
지금이라면,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눈앞의 렌자드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는 눈엔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그래, 더는 저 헛소리를 듣고만 있어선 안 돼.’
드러내 놓고 나를 적대하는 렌자드 때문에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실이 뭐든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나를 미워하는 건 렌자드의 자유지만 어쨌든 그날의 이상한 점에 대해선 그도 알아야 했다.
프리실라. 그냥 귀족도 아니고 탄제리크 공작가의 안주인의 사망 원인이 출산으로 인한 과다 출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에는 신전이 있으니까.
아무리 돈으로 좌우되는 신전이라 해도 헤이녹스라면 그깟 돈 몇 푼으로 아내를 죽이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탄제리크와 신전이 연관되어 있는 일.
‘신전이 탄제리크의 부름을 무시했거나, 혹은 누군가 신관이 공작가에 오지 못하게 했거나.’
이유가 무엇이든 이 일의 배후는 공작가의 내부 분열을 원했을 거다.
실제로 프리실라의 죽음 이후 공작가는 싸늘해지고 결국 흑막으로써 황실과 대립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원하는 대로는 안 되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소원대로 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내가 록시나 탄제리크가 되었고, 이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내겐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진 이 평화를 지킬 의무가 있다.
‘말하자.’
나는 여전히 나의 의지와는 반하게 떨리는 손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말…….”
“시러.”
“뭐?”
렌자드가 눈썹을 꿈틀댔다.
“너 방금 뭐라고…….”
“네 말대로 하기 실타고.”
“하! 너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렌자드가 기가 찬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렌자드도 그제야 나의 변화를 알아차린 듯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진심이야?”
“그럼, 거짓말이게써?”
그리고 나는 렌자드를 향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내가 오늘 날 잡고,
‘네 말본새 고쳐 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너 말 징짜 욱기게 한다.”
“뭐?”
“내가 공쟉 부인을 주겼다고?”
“하! 이게 진짜…….”
“내가 언제?”
나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주겼능데? 난 공쟉 부인을 본 적도 업써.”
“그야 네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멀 알고 주겼다는 건데?”
“그, 그건…….”
렌자드가 나의 질문에 어버버 대는 사이, 여태껏 묵혀만 두었던 말을 꺼냈다.
“난. 주긴 적. 업서.”
“야!”
렌자드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뻔뻔? 정도?!”
결국 나도 렌자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아,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건 이렇게까지 유치한 싸움이 아니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왜 안 대는데! 너는 매일 나만 보면 못 자바머거서 안달인데, 나는 겨우 이런 말 한마디도 모태?”
“너랑 나는 다르…….”
“그래. 나는 너랑 달라. 저거도 너처럼 비겁한 지슨 안 하니까!”
“뭐? 비겁?! 너 말 다 했어?”
“아니! 아직 다 안 해써.”
나는 나를 금방이라도 때릴 기세로 노려보는 렌자드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나를 낳은 건, 공쟉 부인의 선택이어써.”
“어머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너두 알고 이짜나? 사실 잘모탄 건 내가 아니라는 거. 여기에 원망해야 댈 사람은 아무도 업다는 거.”
나의 말에 렌자드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그건…….”
“그때 공쟉 부인을 도울 수 있능 건 신전바께 업서써. 너도, 나도, 공쟉님도 아닌 신전.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 것두 신전이고.”
“아냐…….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혼란스러움에 잔뜩 일그러진 렌자드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신경 써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미어하려면 저 위에 신이나 미어해. 갠히 만만한 나한테 그러지 말고.”
멍한 얼굴로 제자리에서 굳어 있는 렌자드를 두고 문으로 걸어가니, 수많은 사용인 사이에서 언제 왔는지 모를 체드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무시하고 식당을 나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앤이 허겁지겁 나를 따라 나왔다.
“가, 같이 가요 아가씨!”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탓에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가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발길을 멈추었다.
“헉, 헉…… 아가씨?”
“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앤을 올려다보자 앤이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네, 아가씨…….”
내가 앤을 부르자 이쪽으로 쏠리는 따끔한 눈초리를 느끼고 다시 앞을 보았다.
“일단 방으러 가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