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안넝하세여, 공쟉님.”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는 헤이녹스의 얼굴에선 오늘도 광이 났다.
‘집에서 저렇게 입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은가?’
헤이녹스는 마치 연회장이라도 가는 듯한 차림새였다.
‘화려한 건 아닌데…….’
묘하게 세련된 분위기가 흘렀다.
감색 팬츠에 작은 금색 단추가 달린 베스트, 그 아래 받쳐 입은 흰 셔츠 위로 꽂힌 짙은 녹색의 에메랄드가 빛났다.
눈에 확 띌 만큼 커다랗거나 화려한 보석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 가치는 천문학적일 것이다.
탄제리크 공작가는 그만큼의 재력이 있었고, 헤이녹스는 뼛속부터 귀족이니까.
‘딸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볼따구가 처질 지경인데 팔자도 좋구나.’
내가 속으로 툴툴대며 서 있자 헤이녹스가 눈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거라.”
“녜.”
내가 저번에 이 소파에 올라가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면서 다시 앉으라고 하다니. 정말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게 분명했다.
“오늘이 첫 수업이라고 들었다.”
“헉, 헉. 마자여.”
“어땠나?”
헤이녹스는 긴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짜 올라온 소파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답했다.
“조아써여.”
“어떤 게?”
“숫쟈도 배운 것도 조코, 성생님도 조코…….”
“특이하군. 디칼을 좋아하는 아이는 흔치 않은데.”
하긴. 디칼은 덩치도 크고 곰처럼 생겼으니까 무섭다고 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닌걸.
“그런 거눈, 애들이나 하눈 말이에여.”
“애들? 너는 애가 아닌가?”
헤이녹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아, 맞다. 나 네 살이지.’
“저, 저눈 걔네랑 다르니까여…….”
“네가 뭐가 다르다는 거냐?”
헤이녹스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열심히 머리를 돌렸다.
‘뭐라고 해야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헤이녹스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결국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 저눈 탄제리크니까여!”
‘하필이면 말을 해도…….’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당당하게 해 버렸다. 헤이녹스라면 분명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그래. 그렇지.”
‘엥?’
놀랍게도 헤이녹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는 탄제리크가의 적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그러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치를 잘 알고 있구나.”
‘아, 비꼬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뭘 배웠지? 아는 게 없어서 가르칠 게 많았을 텐데?”
‘저게!’
이번에는 비꼬는 것임이 분명한 말에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안락한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히 속을 진정시켰다.
“오느른 숫자를 배워써여.”
“숫자? 하루 종일 그것만 배웠나?”
“녜.”
‘왜. 뭐. 문제 있냐?’
그의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에도 나는 당당히 말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헤이녹스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해는 한 거겠지.”
‘허. 참. 당연한 소리를.’
“녜.”
“어디까지 배웠나. 두 자리?”
“아녀. 다섯 자리까지 배웠눈데여.”
“흠? 두 자리 이상은 쓰임새가 넓지 않아 잘 가르치지 않을 텐데.”
“마쟈여.”
“그런데 왜?”
“다룬 것두 귱금해서여.”
“공부가 적성에 맞나? 하르펠 후작 영식은 후계자 수업이 싫어 허구한 날 도망친다더군.”
“저도 마냥 조은 거눈 아니에여.”
물론 예전에 넉넉하게 배우지 못했던 한을 풀려고 열정적으로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마냥 재미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지.’
일단 이 집에서 머무르기로 한 이상 최대한 헤이녹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요청한 수업에 대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쪽이 좋겠지.
“좋은 건 아니지만 배우고 싶다?”
“녜.”
나를 보는 헤이녹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느낌.
원작을 생각하면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다.
‘수상하단 말이지.’
최근의 헤이녹스는 답지 않게 내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보고를 하라고 하는 거겠지.
‘이제야 딸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 아닐 테고…….’
어찌 되었든 내 입장에선 헤이녹스의 관심을 잡아 두는 쪽이 이득이다. 문제는 그 관심이 호감인지 적대감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아까 비꼬듯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동안 헤이녹스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웃었어?’
아 어떻게 해. 저 표정은 빼도 박도 못하게,
“흥미롭군.”
찍힌 거다.
예전 상사가 나를 괴롭히기 전에 꼭 저런 웃음을 지었단 말이야.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여……?”
내가 조심스레 묻자 헤이녹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도 끝나는 대로 와라.”
“네엥…….”
나는 소파 위에서 뛰어내려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 * *
탁-
문이 닫히자, 헤이녹스는 방금 전까지 저 자리에 앉아 있던 록시나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책상 앞으로 향했다. 그러곤 그 위에 세워 둔 갈색 액자를 들어 올렸다.
액자 속에는 따뜻한 봄 내음을 풍기는 노란 머리칼에 생기를 머금은 초록 눈을 한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리실라…….”
헤이녹스가 액자 속 사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오랜만이야.”
4년 만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한 게.
전장에서 돌아온 지 2주가 넘었지만, 그동안 헤이녹스는 차마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다.
“피 냄새가 날까 봐…….”
무려 4년을 전장에서 굴렀다. 가장 위험한 그 선두에서 수많은 제국군을 이끌고, 장장 4년을.
적들을 베면서 프리실라를 잃은 슬픔을 잊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그녀를 잃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런 모습으로는 당신을 볼 수가 없었어, 미안해.”
헤이녹스가 고개를 숙여 사진에 이마를 댔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 * *
수도 북쪽에 위치한 필리티움 황궁.
그중 가장 작은 아펠라 궁에 사는 2황자 로이스터 필리티움은 시녀를 따라 황후궁으로 향했다.
황후궁은 그가 머물고 있는 궁보다 세 배는 족히 커 보였다. 화려한 궁의 외관과 궁 안팎을 오가는 수많은 사용인들이 그 규모를 짐작케 했다.
궁에 들어서자 넓은 정원이 보였다. 화려한 장미와 튤립으로 가득 찬 정원의 가운데 하얀 테이블 앞에 앉은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로이스터는 그녀의 앞에 가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 2황자 왔군요.”
황후, 안젤라나 필리티움은 로이스터가 보이는 인사 예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가 편하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자 로이스터는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야 황후의 입이 열렸다.
“흐음……. 황자는 아직 인사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계신 것 같군요.”
황후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황자는 제국의 얼굴입니다. 그 누구보다 완벽해야지요. 루엔트 제국의 2황자가 이런 형편없는 예법을 구사한다는 걸 알면 북부의 야만인이 얕볼까 겁납니다.”
“……그런 일은 없게 할게요.”
안젤라나는 로이스터의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할…….”
“어떻게 말이죠?”
“더 연습할게요.”
“황자. 제가 말한 건 연습 시간을 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랍니다.”
그녀는 방금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아.”
그리고 마치 귀한 가르침이라도 주는 마냥 선심을 쓰듯 말했다.
“손짓과 발짓, 숙이는 모습과 작은 숨소리까지. 아주 사소한 것조차 그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죠.”
안젤라나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제가 후궁 소생인 황자께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보군요.”
로이스터는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황제의 후궁, 그녀의 친모 나오미는 떠돌이 무녀 출신이었다.
“……노력할게요.”
결국 로이스터는 늘 그랬듯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황후궁을 나와 다시 아펠라 궁 앞에 도착했을 때, 로이스터는 얇은 숄만 걸친 채 자신을 기다리는 나오미를 발견했다.
“왜 나와 계셨어요.”
나오미가 제 물음에 답하려다 마른기침을 하는 통에 걸음을 더욱 빨리 재촉했다.
“몸도 약하신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나오미는 잔뜩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에 살짝 웃어 보였다.
“폐하와 대화는 잘 나누셨나요?”
“……네.”
로이스터는 황후가 건넨 원목 상자를 내밀었다.
“피로 회복에 좋은 차래요. 매일 점심 식사 후에 타 먹으면 좋다고 하셨어요.”
나오미는 활짝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감사하기도 해라. 저도 황후 폐하께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나오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드릴 만한 게 없네요…….”
나오미는 눈물을 살짝 머금은 채로 중얼거렸다.
로이스터는 속으로 황후궁을 떠나기 전 안젤라나가 한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감동한 듯한 나오미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 * *
“안넝하세여, 성생님.”
디칼은 평소보다도 표정이 밝아 보이는 록시나에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앗! 티 나나여?”
나는 진심으로 신이 났다.
방 밖으로의 외출이 잦아진 요즘, 앤과 함께 몰래 먹는 디저트에 푹 빠졌는데 주방장인 푸이치가 늘 쿠키만 먹는 게 신경 쓰였는지 특제 레시피로 만든 애플파이를 구워 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디칼은 차마 ‘네.’라고는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주방장이 이따가 파이 만드러 준다고 햇거둔여.”
“주방장이라면…….”
“푸이치여!”
디칼은 나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이치 눅스의 디저트는 아름다운만큼 맛이 좋기로 유명하지요. 오늘은 어떤 파이를 구운 답니까?”
“애플파이여!”
푸이치는 제국 내에서도 이름난 요리사였고, 그중 그의 디저트는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책에서만 봤는데 내가 직접 먹는다니!’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웃고만 있는 내 눈치를 보며 디칼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