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 *
“형! 왜 막은 거야? 전부 맞는 말이잖아!”
렌자드는 차마 체드만을 탓하지는 못하고 발만 굴렀다.
“걔 때문에 우리 집이 엉망이 되었다고!”
“렌자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렌자드는 생소한 형의 얼굴에 흠칫했다.
체드만의 표정은 열세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게 식어 있었다.
“혀, 형도 쟤한테 화난 거야?”
“아니.”
“그럼 왜…….”
“넌 뭔가 달라진 거 못 느꼈어?”
“달라진 거?”
“그래. 그 애, 아버지가 오시기 전과 달라진 거 못 느꼈냐고.”
렌자드는 체드만의 말에 좀 전의 록시나를 떠올렸지만, 더 건방져진 것 말고는 딱히 다른 게 없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어. 그대로인 거 같은데?”
“그래?”
‘기분 탓인가?’
체드만은 순간적으로 느껴진 위화감에 뚫어져라 방문을 바라보다, 이내 렌자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렌자드.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
“어, 어? 그게…….”
체드만이 모르는 척 넘어갈 줄 알았던 렌자드가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별말 아니었…….”
변명거리를 찾으려 눈을 굴리는 렌자드에 체드만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뭐라고, 하려 했냐고.”
“히, 끅!”
평소의 서글서글한 낯과는 다르게 체드만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 그게…… 나는 그냥 거, 겁만 조금 주려고…….”
“겁을 주려고?”
“걔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으니까, 그것만 말해 주려고…….”
“하.”
한껏 눈치를 보면서 답하는 렌자드에 체드만이 작게 피식거렸다.
그 모습에 그의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렌자드가 그를 따라 웃었다.
“혀, 형도 웃기지? 자기가 우리 어머니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인데…….”
“렌자드 탄제리크.”
경고하듯 렌자드의 이름을 부른 체드만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더 싸늘해져 있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체드만은 제자리에 굳어 버린 렌자드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네 말처럼 우리 어머니잖아. 네 어머니가 아니라.”
렌자드의 몸이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체드만은 그 모습에 즐거운지 한껏 눈을 휘었다.
“그런데 함부로 그런 말을 꺼내면 되겠어?”
렌자드가 방으로 금방이라도 도망칠 기세자, 체드만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심하자. 알겠지?”
“응…….”
체드만이 떠난 후에도 렌자드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집무실 앞에서 다쳐서 앓아누웠지만 정작 헤이녹스는 찾아오지 않았다.
앤은 왜인지 실망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물론 작은 기대를 하긴 했지만 렌자드 덕분에 의미 없다는 걸 다시 깨닫기도 했고.
“공작님도 참 매정하시지. 한 번쯤 들러 주시면 좀 어때서…….”
“앤.”
“네.”
앤은 나보다도 더 기분이 상해 보였다.
내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속상해하는 앤이 고마웠다. 그게 만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사이라면 더.
비록 진짜 록시나와 앤 사이에선 더 오랜 교류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나 쿠키 먹고 시퍼.”
“네…….”
앤은 나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주방으로 내려갔다.
“하…….”
나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이 집에 일원이 되는 것보다 자금줄을 잡아 독립하는 게 훨씬 나은 삶이 될 거라는 게 더욱 분명해졌다.
* * *
“우으음.”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오늘 처음으로 선생님을 만나시는 날이잖아요.”
어느덧 이 소설 속에 들어온 지도 2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선생을 불러 주겠다던 헤이녹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전담 교사를 고용했다.
몽롱한 나를 깨우는 앤의 모습은 어쩐지 처음 록시나가 되었을 때와 겹쳐 보였다.
“웅…….”
다른 점이 있다면 나름 시녀들의 손길에 익숙해졌다는 거?
“공작님께서 아카데미 교수님을 부르셨대요. 그것도 ‘대 루엔트 제국과 그 땅의 역사에 대하여’ 의 저자이신 디칼 님을요!”
“디칼?”
원작에서 디칼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제국뿐 아니라 주변국까지 총정리된 지도를 만들어 지리 부분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니까.
‘고작 귀족 영애 한 명 가르치러 오기에는 너무 거물 아닌가?’
내가 그의 방문에 의아해하는 찰나, 앤이 말을 이어 갔다.
“마침 디칼 님께서 아카데미 교수직을 쉬고 계시니 다행이에요!”
“아!”
디칼이 제국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는 건 원작이 시작되고 나서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후가 되는 거겠지.
‘아직 디칼이 아카데미 교수를 하고 있으니까.’
그가 명성을 얻기 전, 아카데미 교수직을 하고 있었고 그의 책이 교재로 쓰이기까지 했다는 걸 떠올린 나는 흡족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완전 대박이잖아……?’
아직 그가 덜 까다로울 때 인맥을 만들어 놓으면 후에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그론데, 나눈 아직 글 쓸 줄 모르눈데…….”
전담 교사가 디칼인 건 좋은데, 문제는 나의 진도 상태다.
오늘이 첫 수업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르는데, 첫 교사부터 디칼이라니.
헤이녹스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배려가 없어, 배려가.’
앞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헤이녹스의 무심함에 나는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아가씨,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직 핀을 고정하지 않아서 자꾸만 흐트러져요.”
“알게써.”
거울 속으로 집중하고 있는 표정의 앤이 보였다.
‘앤도 참 착해.’
며칠간 함께 지낸 앤은 정말 성실한 사람이었다. 내가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가까스로 일어날 때쯤에 그녀는 이미 환복까지 한 상태로 창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싫어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있어도 귀찮은 티 하나 내지 않고 나를 살살 달랬다.
아무리 변방의 작은 자작가 출신이라도 귀족은 귀족인지, 앤은 쉽게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없었고, 나의 간식을 나르는 손짓 하나하나에도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가장 가까이서 이 세계에 대해 알려준 건 앤이니 그녀가 내 첫 선생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앤은 대다내…….”
“네?”
앤의 나의 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앤은 이쁘구…… 착하구, 똑똑하구…….”
어쩌면 내가 이 저택을 나갈 때 그래도 눈에 밟히는 게 앤이 될 것 같을 정도로 그새 많은 정이 들었다.
“가, 감사해요.”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지, 앤의 볼에 발그레 달아올랐다.
“하지만 공녀님이 훨씬 더 예쁘신걸요?”
“내가?”
“그럼요! 이 비단 같은 머리칼과 사파이어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가 어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가씨뿐일 거예요!”
‘그렇긴 하지.’
원작 내에서도 록시나의 외모는 여주인공 베베라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성격 때문인지 올라간 눈꼬리나 새파란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주기도 했으니 결코 온화한 외모는 아니었다.
아마 헤이녹스와 꼭 닮은 나의 눈동자를 보고 반짝이는 사파이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앤 밖에 없을 거다.
‘아직은 애여서 그런가, 진짜 귀엽긴 하다.’
통통하고 새하얀 양 볼과 생기를 주는 옅은 홍조.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와 앙다문 입술은 누가 보더라도 손뼉을 칠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가씨도 아가씨가 얼마나 예쁘신지 아시겠죠?”
넋이 나간 내 표정에 앤이 짓궂게 물었다.
“그러…… 아, 아니.”
순간 그대로 수긍할 뻔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눈엔 앤이 훠얼씬 예뻐.”
“아가씨…….”
앤이 정말로 감동받았는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군데…… 나 언제 가?”
“어머나!”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굴던 앤이 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해요! 디칼 님께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러더니 나를 안고 재빨리 방을 나섰다.
“아, 안아 주지는 않아도…….”
되는데…….
* * *
결국 앤에게 안긴 채로 나의 첫 스승, 디칼을 만나게 되었다.
디칼은 나의 어린애 같은(어린애가 맞긴 하지만) 모습에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칼 페비엔트. 탄제리크 공녀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여, 성생님. 록시나 탄제리크임니다. 펴나게 불러 주세여.”
디칼은 나의 공손한 말투에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좋습니다. 오늘은 첫 수업이니 간단한 테스트만 보고 끝내도록 하지요.”
“아, 저기 그게…….”
내가 부끄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자, 디칼이 대답을 종용했다.
“괜찮으시겠지요?”
“그게…….”
문 근처에서 소리도 없이 서 있는 앤을 슬쩍 바라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본인이 더 속상해하는 모습에 나는 용기를 내 말했다.
“저 글 쓸 줄 몰라여!”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니 앤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디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마주한 디칼은…….
“허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아, 정말로…….
‘수치스럽다…….’
다행히도 디칼은 그의 무례를 인식했는지 금방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에 더 창피했지만.
“크흠. 그렇다면 글부터 배우셔야겠군요. 숫자는 쓸 줄 아시겠지요?”
“아니여…….”
“어, 음. 지도를 읽기 위해 숫자는 필수인데…….”
“그럼 숫자부터 가르쳐 주세여.”
그냥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텐데 일일이 부끄러워하다가는 수업 진행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오늘은 숫자 읽는 법을 익히도록 하지요.”
디칼은 나를 가르치기 위해 들고 온 두꺼운 지도를 의자 아래에 밀어 두었다.
“먼저 1은…….”
휴직 중인 아카데미 교수에게서 배운 제국의 기호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숫자를 볼 일이 많을 텐데 다행인 일이었다.
“두 자리 숫자는,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세 자리 숫자부터는 장부 정리가 아니라면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만 기억하셔도…….”
“아녀.”
무슨 소리. 내가 숫자를 배우는 게 그 장부 때문인데.
“더 배울래여. 더 가르쳐 주세여.”
“예? 하지만 공녀님께선 이리 큰 숫자를 사용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더 궁그매여. 가르쳐 주세여.”
“정 그러시다면…….”
디칼은 잉크 통 뚜껑을 닫다 말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수가 커질 때마다 이 기호를 붙입니다만, 다섯 자리 숫자는 특이한 경우로 중간에 `를 붙입니다.”
“으응. 그러쿠나.”
‘역시 가르쳐 달라 하길 잘했다. 봐봐. 해 달라면 나오잖아.’
나는 무려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겸하고 있는 능력자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대 루엔트 제국의 수재들만 모여 있다는 곳에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면 분명 아는 게 많을 거다.
이곳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로서는 이만한 정보상이 또 없다.
“아주 잘 습득하시는군요.”
디칼이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제국어를 배우시게 될 겁니다.”
“성생님, 수고하셨슴니다아.”
“공녀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틀 후에 뵙지요.”
디칼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그 앞에 서 있던 앤이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수업은 어떠셨어요? 디칼 님 풍채가 좋으시던데, 무섭진 않으셨어요?”
앤의 걱정이 영 쓸데없는 건 아니었다. 디칼의 덩치는 정말 컸으니까.
제국민들의 필수 교재나 다름없는 책을 썼다길래 엄청 비실비실한 학자일 줄 알았건만, 디칼의 몸은 웬만한 기사들처럼 탄탄했다.
게다가 내 걱정처럼 콧대가 높거나 오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덩치만 커다란 곰 같다고나 할까?
“응. 하나도 앙 무서워써.”
“다행이네요. 방으로 돌아가시겠어요?”
나는 앤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공쟉님항테 가야 대.”
나 공작에게 후기 알려 줘야 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