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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4)화 (4/106)

<4화>

‘뭐지?’

나는 도무지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무엄하다며 기분 나빠할 줄 알았건만, 그는 정말로 즐거운 일을 보았다는 듯 입가에 깊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무엇이 배우고 싶다고?”

‘됐다!’

다행히도 나의 당돌함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나 보다. 과감하게 나간 보람이 있었다.

나는 헤이녹스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글자여!”

“그거면 되나?”

나는 헤이녹스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아직 내 이름도 못 쓰는데 더 바라도 되는 걸까? 글자를 익힌 후에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이라고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이후 계획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읊기 시작했다.

“역사두 배우고 시퍼요. 지리두 궁금하구요, 악기두 다루고 싶구, 음, 그리고 또…….”

헤이녹스는 내가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고민하는 것을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혹시나 너무 과한 부탁을 했나 싶어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그, 그게 앙 대며눈, 악기는 빼도…….”

하지만 내 소심한 제안에도 헤이녹스는 가만히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 지리는 앙 대는데…….”

내 계획은 소설 내에서 여주가 손댈 사업을 먼저 낚아채는 것이다.

그중 가장 우선적으로 향할 곳은 바로 ‘하르켄 광산’.

이 작업을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원작 여주가 등장하기 전 언급되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는 하르켈 광산은 주변 국가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 탄제리크가에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원작에선 공국의 침략으로 폭발되었지.’

그 탓에 주변 영지민의 피해도 엄청났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공국의 침략이 언제인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지리를 배워 그곳을 직접 찾아가 볼 생각이다.

‘이 일만 잘 풀린다면 일단 위태로운 내 위치가 공고해질 거란 말이지.’

광산이 탄제리크의 소유가 되면 자연히 공국의 공격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탄제리크가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니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헤이녹스도 달라진다.’

그러니 나는 이 일을 완수해 헤이녹스에게 반드시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에게 인정받아 광산 소유권을 받아 낸다면 혹시나 헤이녹스가 나를 내치더라도 안전한 자금줄이 있을 테니 문제없다.

나는 간절함을 담아 헤이녹스를 올려다보았다.

“제, 제발여…….”

아, 불쌍하다. 내가 봐도 불쌍해. 이렇게 귀엽게 생긴 애가 큰 눈에 눈물을 매달고 울먹대는데 누구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라.”

역시. 제아무리 헤이녹스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는 감정을 숨긴 것이지 결여된 사람이 아니니까.

“감샤해여, 공쟉님!”

내가 활짝 웃어 보이자 헤이녹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쳇. 마주 웃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잠깐 괘씸한 마음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겐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시져? 젼 이만 가 보게쑵니다. 안녕히 계세여.”

착실히 인사까지 하고 나가려는데, 등 뒤로 헤이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록시나 탄제리크.”

“녜?”

‘할 말이 더 남았나?’

그가 부른 이유를 모르겠어 문 앞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가 담담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수업을 빠지는 일은 없겠지?”

“네?”

‘수업을 빠진다고?’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하고 싶은 수업이었고, 그래서 부탁했다. 땡땡이치고 어딘가에서 몰래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부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일은 업슬 꺼에여.”

“그걸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화, 확신이여?”

헤이녹스도 내가 흔들린다는 걸 알았는지, 그의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나는 불확실한 것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멀 바라시눈데여……?”

그가 저렇게 완강하게 나온 이상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아직 내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것도 전부 탄제리크의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되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마디로, 그가 말하는 건 무엇이든 내가 값을 치를 수 없을 것이다.

‘투자라고 말을 할 줄이야. 아주 지원해 주기 싫어서 몸이 닳았구나.’

이렇게까지 나오니 단순히 록시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내가 싫은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렌자드처럼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이 집안 사람들 다 똑같구만.

뻔한 결론에 내가 교육에 대한 희망을 접고 있을 때였다.

“매일 수업을 요약해 오너라.”

“녜?”

“그날그날 배운 내용을 정리해 나를 찾아와라.”

“그치만…….”

헤이녹스의 명에 따라 수업을 받게 되면 담당 교사가 그에게 착실하게 보고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나를 보고 찾아오라고?

“네가 정말 열심히 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니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포기…….”

“아녀!”

하하. 공작님, 성격도 급하셔라.

“맨날 올께여! 끝나자마자 바로 올께여!”

“그래. 늦지 않도록 주의해라.”

“녜…….”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뒤를 슬쩍 돌아보았을 때, 헤이녹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 * *

“먼가…… 먼가 속은 기부닌데…….”

나는 복도를 걸으며 좀 전의 일을 상기시켰다.

“웃고 이써서…….”

그는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기분 좋은 포만감에 나른해진 맹수 같은…….

“아가씨!”

퍽!

“아!”

앤이 소리침과 동시에 나의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으으윽!”

보기보다 세게 박았는지 머리 전체가 울렸다.

“아가씨! 머리에서 피가……!”

‘피?’

앤의 말처럼 정말로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난 갠찬…….”

“뭐야?”

그때 가까이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왜 여기에 있어?”

고개를 들어 보니 렌자드가 기분이 나쁜 티를 팍팍 내며 다가왔다.

“내가 분명 방 안에만 있으라고…….”

‘아…….’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앤의 얼굴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이 찌그러져 보였다.

한참을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야는 멀쩡했던 속까지 울렁이게 만들었다.

“우욱!”

“아가씨!”

어딘가 당황한 듯한 렌자드를 두고,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깨어나실 때가 됐는데 왜 아직까지…….”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곧 일어나실…….”

앤과 낯선 이의 목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왔다.

“으, 으윽…….”

“아가씨!”

앤은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쏜살같이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머리는 좀 어떠세요?”

“아파…….”

여전히 아팠다. 다만 시야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멜레푸 님. 왜 아가씨께서 아직도 아파하시는 거죠? 분명 괜찮으실 거라고…….”

“공녀님. 이게 몇 개로 보이십니까?”

멜레푸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둘…… 윽!”

“그럼 이것은요?”

이번엔 그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다섯…….”

나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멜레푸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앤의 어깨를 토닥였다.

“후유증이 남으신 거 같네. 며칠 쉬시면 나아지실 테니 너무 걱정 말게.”

“감사합니다, 멜레푸 님.”

앤은 멜레푸가 나갈 때까지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앤.”

“네, 아가씨.”

“나 얼마나 자써?”

“반나절 정도 앓으셨어요.”

“그러쿠나…….”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앞에 있는 벽을 보지 못해 부딪치다니.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살며시 이불을 끌어 올릴 때였다.

“야! 바보 록시나!”

“렌자드!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방문 밖에서 렌자드와 체드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록시나. 멜레푸한테서 깨어났다는 소식 들었어. 들어가도 되겠니?”

뭐야, 언제부터 다정했다고?

하지만 나는 아까 웃고 있던 헤이녹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직 원작이 시작되지 않은 데다가 록시나가 포악해지기도 전이니까, 잘하면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구박받지 않고 말이다.

우선 헤이녹스도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체드만도 조금은 살가워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이 문을 열자 체드만과 함께 렌자드도 들어왔다.

“록시나. 괜찮니? 세게 박았다고 들었는데.”

“형. 그냥 세게가 아니라 완전 쾅! 코앞에 벽도 못 보고 박았다니까? 완전 웃기지 않아?”

“렌자드.”

체드만의 경고에도 렌자드의 빈정거림은 쉬이 잦아들지를 않았다.

아, 역시 괜한 기대였나.

“멍청해서 행동도 바보같이 하나 봐!”

“렌자드!”

도를 넘은 말에 체드만이 소리쳤지만, 내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전 갠차나요. 제가 앞을 못 바서 다칭 건 사실인걸여.”

“봐. 들었지? 자기도 인정한 거라니까?”

렌자드가 나의 자책 섞인 말에 더욱 의기양양해져 말했다.

“너 같은 게 탄제리크라니 믿기지가 않아.”

그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하고는 하나도 닮은 곳이 없잖아. 알고 보니 아버지와 비슷한 애를 주워 온 거…….”

그의 비난에도 반박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나는 렌자드의 마지막 말에 꾹꾹 담고 있던 말들을 터뜨려 버렸다.

“머? 주워와?”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전생에서도 고아원에서 자랐던 내게 주워 왔다는 말은 신경줄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뭐, 뭐야?”

렌자드도 달라진 태도를 눈치챘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갔다.

“그건 공쟉님뿐만 아니라, 나를 낳아주신 공쟉 부인까지 모욕하눈 거야.”

다행히 발음은 딱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만 샜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혀 짧은 소리를 냈다면 정말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을 텐데 다행이었다.

“말 함부러 하지 마.”

“뭐, 뭣……!”

잠시 당황하던 렌자드는 곧 내게 밀렸다는 사실이 분한 듯 소리쳤다.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어느새 렌자드의 목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엄마가 죽은 건……!”

체드만이 선을 넘기 직전의 렌자드를 가로막았다.

“미안해, 록시나. 피곤할 텐데, 좀 쉬어.”

그러곤 여전히 콧김을 뿜어 대고 있는 렌자드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하…….”

그동안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녀의 눈에는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앤이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애써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응. 걱정해 줘서 고마어.”

앤도 나를 보곤 무거운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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