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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3)화 (3/106)

<3화>

오늘은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처음 며칠은 렌자드가 다시 찾아와 시비를 걸까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그가 다시 찾아와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아, 평화롭다.’

구체적인 계획은 천천히 짜기로 하고 우선 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로 했다.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재미있는 책과 먹을거리까지.

사실 책은 아직 펼치지도 않았지만.

‘이제 읽자!’

나는 내 손바닥만 한 쿠키를 한입에 쑤셔 넣고 손에 묻은 가루를 탈탈 털었다. 그러곤 표지가 예뻐서 골라 온 책을 무릎 위에 올려 읽기 시작했다.

“음……. 모라는 건지 모르겠네.”

보통 이렇게 책 속으로 빙의가 되면 자연스레 글자도 읽을 수 있지 않나?

잠시 들었던 의문은 이 집에서의 록시나에 대한 취급을 떠올리자 금방 사라졌다.

아직 어린 네 살이지만 제국의 공녀가 글을 아예 모르기엔 많은 나이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누구도 록시나에게 글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에효, 진짜.”

아무리 버렸다시피 했더라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지식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니.

그나마 말이라도 할 줄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일주일간 이 방에서 지내면서 록시나를 가까이서 챙기는 건 ‘앤’이라는 시녀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덕에 ‘록시나’의 삶에 적응하는 건 무리 없었지만 그 외적인 부분은 도통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렌자드가 눈에 불을 켜고 있기 때문에 록시나가 방 밖으로 나가는 걸 저택 내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 때문에 식사도 방 안에서만 해야 했지.

앤은 그런 나를 안쓰러워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래선 안 돼.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했을 때 이제라도 행동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헤이녹스의 눈에 들어야 하니까.

일주일 동안 생각한 결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써먹어 살아남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아는 정보는 본격적으로 원작이 시작된 이후의 것이라 아직 시기가 멀긴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를 해 둬야지.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우선 발생한 문제인 글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흠…….”

바쁜 공작이 저택으로 들어온 지금이 교육을 요구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래. 아무리 딸한테 관심이 없어도 글 배운다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부탁하기 전,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대로 공작을 만나러 간다면 다시 렌자드를 마주치게 될 거야.’

사소하지만 일주일 동안 내 행동에 가장 큰 제약이었던 문제.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선, 한번 부딪혀 봐야지.

“그래!”

“아가씨?”

앤은 내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나 공쟉님한테 데려다줘.”

“네, 네에?”

나는 머뭇거리는 앤을 향해 팔까지 뻗으며 재촉했다.

“얼릉.”

* * *

“저분은…….”

“록시나 아가씨 아닌가?”

“아가씨가 어쩐 일로…….”

나는 렌자드의 기세뿐만 아니라 그간 아팠던 몸 때문에 외출이 뜸했다고 앤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고개를 갸웃댔다.

“그런데 지금…….”

“안기신 건가?”

맞다. 나는 지금 앤에게 안긴 상태였다.

호기롭게 나온 것과 달리 생각보다 많은 시선에 괜히 쑥쓰러워져 얼굴을 앤의 품에 파묻었다.

가문의 주인이 신경 쓰지 않는 자식이니 당연 사용인들도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저택에서 외로웠다고 했으니까.

방 안에만 있는 바람에 만난 사람은 앤 밖에 없긴 했지만, 그녀가 친절한 건 타고난 성정이 착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냐고…….’

여러 명의 눈동자가 떨어질 생각을 않으니 당당하게 안아 달라 요구했던 내가 점점 창피해졌다.

“이, 이제 내려 줘…….”

“네? 그치만 곧 있으면 도착인걸요?”

“빨리이…….”

앤이 나를 내려 주기 위해 무릎을 꿇자, 재빨리 바닥에 발을 디뎠다.

‘역시 이건 아니야.’

어린애의 몸에 들어왔다고 정신까지 어려졌나 보다.

“정싱 차려!”

나는 스스로에게 경고를 하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두 뺨을 때렸다.

짝-

“아가씨!”

앤이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왜 그러세요!”

꽤나 세게 때렸는지 뺨이 얼얼했다. 이렇게까지 힘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어려지니 몸을 마음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다.

“아야야…….”

내가 열이 오른뺨을 만지작대고 있자, 앤이 그 위에 손을 겹쳤다.

“이게 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찾아오지 않으셔서…… 흑!”

‘에?’

아무래도 크나큰 오해를 하게 된 것 같다.

가령 내가 공작의 관심을 받고 싶어 스스로를 때렸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 말이다.

“그런고 아니야, 앤. 이거눈 구냥…….”

내가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가 걱정할까 봐 그러시는 거죠? 아아, 우리 착한 아가씨를 어쩌면 좋아!”

“아니 그게 정말루…….”

“내 집무실 앞에서 뭐 하는 짓이지?”

“고, 공작님……!”

일주일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무감한 표정의 헤이녹스가 보였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그, 그게…….”

앤은 헤이녹스가 뿜어 대는 위압감에 입만 뻥긋댔다.

지나가던 사람이 지금의 앤을 본다면 헤이녹스가 무슨 큰 벌이라도 내린 줄 알겠다.

‘하는 수 없지.’

내가 직접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그와 마주칠 기회가 올지 모른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원작에서 성인이 된 록시나는 헤이녹스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렸을 때 어떻게 불렀는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아 뭐라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래. 내 마음대로 하자.’

“공쟉님.”

헤이녹스가 대답은 하지 않고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원작 속 헤이녹스는 공작 부인이 죽자마자 전장으로 떠났으니 어쩌면 자기 딸이 말을 하는 모습이 생경할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헤이녹스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저한테 성생님을 주세여!”

“선생을 달라?”

헤이녹스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보는 눈이 많군.”

그의 한마디에 우리를 구경하던 사용인들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들어와라.”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헤이녹스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록시나 탄제리크.”

“네? 네에!”

문 앞에 서 그의 집무실을 구경하던 나는 헤이녹스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가갔다.

상석에 앉은 헤이녹스가 그 옆에 놓인 소파를 턱짓했다.

“거기 앉거라.”

“어…….”

그의 말에도 내가 소파를 쳐다보고만 있자, 헤이녹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그게…….”

눈앞의 소파는 높아도 너무 높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키가 월등히 큰 헤이녹스에 맞추어 제작된 것 같은데, 겨우 4살인 아이가 혼자 앉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음.”

헤이녹스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잠깐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못 올라가겠으면 서서 말해도 좋다.”

‘저 자식이…….’

딸이 곤란해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감상이나 하는 모습이라니.

그리 길지 않은 용건이니 그의 말대로 해도 되겠지만, 왠지 기 싸움에서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여. 저 올라갈 수 있는데여?”

그리고 수 분이 지난 후, 몇 번의 시도 끝에 소파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 나는 헤이녹스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헤이녹스는 무슨 생각 중인지 말이 없었다.

“공쟉님?”

“아, 그래.”

그제야 헤이녹스는 상념에서 깨어나 나와 눈을 맞추었다.

“선생을 원한다고?”

“녜.”

“왜지?”

“그야 저눈 글을 모르니까여.”

헤이녹스는 나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몰랐던 건가?

에이, 아무리 딸한테 무관심하더라도…….

“글을 모른다?”

있구나. 있어. 자기 자식이 문맹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부모가 여기에 있었다.

나는 새삼 헤이녹스의 무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름도 쓸 줄 모르나?”

“녜.”

당연한 소리를.

“흠…….”

헤이녹스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손을 턱에 가져다 댔다.

“네 전담 시녀가 누구지?”

“앤이요. 하지만 앤이 잘모탄 건 업써요.”

정말이었다. 적어도 이 소설에 빙의한 지난 일주일은 그랬다.

버림받은 공녀답게 홀대당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주었고, 아침마다 머리도 땋아 주었으니까.

“잘못한 게 없다? 자기 주인이 다섯 살이 되도록 글도 모르는 바보로 둔 게 잘못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다섯 살 아니고 네 살이거든.

나는 딸의 나이조차도 모르는 헤이녹스를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지금 잘못이라고 말하는 그 행동의 주체가 자신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딸의 교육에 대한 책임이 시녀에게 있다니.

아버지라는 자각은 있는 걸까 싶었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앤이 어떠케 하게써여.”

물론 시녀인 앤도 하급 귀족이긴 해서 기본적인 글이나 예법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가르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용인이 주인을 교육한다는 건 하극상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그렇군.”

‘그래. 이제 그만 너의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선생을 붙여 주렴.’

고개를 끄덕이는 헤이녹스를 보며 나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돈이 넘쳐나는 집안이니 전생엔 배우지 못했던 다양한 것들을 마음껏 배울 수 있겠지.

‘일단 글자부터 떼고 나면 제국 역사서도 보고, 이곳 예법도 배우고…….’

기대에 찬 내가 바닥에 닿지 못한 짧은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선생을 불러 달라는 거지?”

“녜?”

“지금껏 아무 말 않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터.”

헤이녹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유?’

순간 어이없음에 육성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껏 아무 말 없었다니.

딸이 태어나자마자 집을 4년 동안이나 비운 사람이 그동안 배움을 원했는지 거부했는지 알기나 할까?

아마 관심도 없었겠지.

솔직한 눈이 점점 그를 노려보려고 하는 걸 겨우 참고 별 의미 없이 대답했다.

“그런고 업써요.”

“이유가 없다?”

“구냥 배우고 시픈 거예요.”

나는 나를 탐색하는 듯한 두 눈을 부러 피하지 않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깊은 청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집무실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놀랍게도, 먼저 눈을 뗀 사람은 헤이녹스였다.

“재미있구나. 아주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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