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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2)화 (2/106)

<2화>

아무래도 나는 죽은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빙의를 한 거야. 록시나 탄제리크로.

록시나 탄제리크는 ‘그 꽃을 꺾지 마세요’의 악녀로, 포악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황태자의 약혼녀였지만 여주가 나타나며 파혼당했고, 갖은 악독한 짓으로 여주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황태자가 여주와 결혼을 강행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다.

록시나 탄제리크가 이렇게 삐뚤어진 것은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그녀를 방치한 아버지와 첫째, 구박했던 둘째 사이에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공작의 말투를 보니 그 생각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 악녀가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헤이녹스의 시선이 내 등 뒤를 향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잘 있었느냐, 체드만.”

“예.”

‘체드만?’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휙 돌렸다.

“록시나?”

벌꿀을 머금은 듯한 금발과 온화한 초록 눈. 나를 놀란 듯 바라보는 소년은,

‘체드만 탄제리크!’

록시나를 방치했던 탄제리크의 첫째, 체드만 탄제리크였다.

“너 형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놀란 내가 체드만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자, 멀리서 어린애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쟤는…….’

아이가 점점 다가올수록 내 추측은 확실해졌다.

언뜻 봐도 성질머리가 더러워 보이는 저 꼬맹이는 끝까지 록시나를 괴롭히던 렌자드 탄제리크겠지.

“그 손 내리라고!”

내가 생각에 잠긴 새에 다가온 렌자드는 아직도 허공에 뜬 채 체드만을 향하고 있는 손가락을 거칠게 내려쳤다.

“아!”

작고 하얀 손등이 붉게 부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게 머 하능 짓이야!”

나는 손등을 부여잡고 렌자드를 쏘아봤다.

렌자드도 지지 않고 나를 노려보자, 보다 못한 체드만이 우리 둘을 중재하려 나섰다.

“아, 아버지도 계시는 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체드만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던 나는 이어 들리는 분노 섞인 목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짐승이 따로 없군.”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택 밖의 개새끼도 위아래는 구분하는데 말이야.”

‘아…….’

진짜 망했다. 이번엔 정말로 화가 난 게 분명하다.

“아버지! 저 계집애가 감히 형에게……!”

“렌자드 탄제리크.”

여전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나를 고자질하려던 렌자드는, 헤이녹스의 분노 섞인 경고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나를 흘기는 눈은 그대로였다.

“록시나 탄제리크. 무례한 건 너 같구나.”

정말 오금이 저렸다. 27년을 살면서 겪은 별별 수난들을 전부 아이들 장난으로 만들어 버리는 압박감이었다.

내가 더는 대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리자, 헤이녹스가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렌자드가 다시 다가와 깐족대기 시작했다.

“그러게, 평소처럼 굴지 그랬냐.”

“렌자드.”

체드만이 내게 미안하다는 듯 눈짓을 하고는 렌자드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나는 록시나 탄제리크다. 이 몸에 빙의한 이상 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제국 제일의 가문이니만큼 부자였으니 당장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치를 부리던 록시나를 떠올리면 전처럼 밥 굶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근데 이 집안 사람들이 록시나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차라리 고아원에 가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렇게 한번 살아 봤으니 더 수월하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아까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시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우선 상황을 좀 더 파악해 봐야겠다.

아까 전, 빈약한 용기로나마 나서주었던 여자는, 고민하는 내 모습을 크게 상심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기……?”

“네, 아가씨!”

“이름이 머…… 이신지?”

“앤입니다. 부디 말을 낮추어 주세요, 아가씨.”

‘아, 록시나는 공녀니까 반말을 썼겠구나.’

나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어색하지만 애써 반말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엉마나 일해…… 써?”

“올해로 5년 차예요, 아가씨.”

5년 차라면 웬만한 저택 내부 사정은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앤의 말을 듣고 나갈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내가 며 쨜이지?”

“생일만 지나면 4살이 되시지요.”

그럼 내가 태어나기 1년 전부터 있었으니까, 공작 부인을 알겠네.

소설 속에 짧게 언급되었던 공작 부인은 록시나를 낳으며 죽었다고 했다.

최대한 이 집안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나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오라부니랑 공쟉님은 옛날부터 저러케 화가 나 계신 고야?”

“그게…….”

내 질문에 앤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시선을 피하는 게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니요……. 제가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였어요.”

앤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와 바뀐 거라곤 공작 부인이 사라지고 록시나가 태어난 것.

공작 부인은 결국 록시나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 때문에 가족에게 외면받는 걸까?

“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를 보는 앤의 표정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렌자드가 저렇게 사납게 구는 것도, 헤이녹스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보듯 무감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역시 모두 록시나 때문에 공작 부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가씨 때문은 아니에요!”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앤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공작께서 4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오셨으니까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애쓰는 앤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 헤이녹스가 오랜만에 돌아온 거라면 무사 귀환에 축하하며 들뜬 모습이어야 할 테니까.

록시나가 미움받는 이유가 정말 그 때문이라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무래도 나가야겠는데?’

이 삶에서도 풍족하긴 글렀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가출 계획을 짜던 그때, 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다급히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동부의 영지를 내리신대요.”

“영지?”

내가 관심을 보이자, 앤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네! 온화하기로 유명한 가케드 영지라고 해요. 이걸로 바닷바람이 시원한 남부의 베지트 영지와 북부의 이멜루 영지를 포함해 제국의 사방에 탄제리크 공작가 소유의 영지가 생기게 되었어요. 아가씨도 좋으시죠?”

아무 말이 없는 나를 살피며 앤의 말이 자꾸만 길어졌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완전 쩔잖아……!’

서부에 위치해 있는 공작가, 그리고 앤의 말에 따르면 이번 공으로 동부의 영지까지 소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단순히 소설 속에서 사치를 부리는 록시나만 봐서 그런지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했는데, 동부의 보석이 유명하다는 말을 떠올리면 지금 이 공작가의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슬슬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 눌러살아야겠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응응, 갠차나. 너무너무 갠차나.”

아무런 말 없이 비실비실 웃기만 하는 나를 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 구박이야 전에도 평생 당하던 거고.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눈칫밥 먹고 살 거면 돈이나 맘껏 써 봐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행복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였다.

“록시나 탄제리크!”

조금 전 형의 손에 이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렌자드가 벌컥 내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나랑 얘기 좀 해!”

“하…….”

“아, 아가씨…….”

앤은 얼굴을 찌푸리는 나와 어딘가 불만이 많이 보이는 렌자드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래, 어차피 여기 계속 있기로 한 거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야.

“앤은 나가 바.”

“네, 네!”

앤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렌자드에게 작게 인사를 하곤 문을 열고 나갔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니 일부러 나가라고 한 건 맞는데 또 저렇게 바로 나가는 걸 보니 괜히 서운해진다.

“야. 너 나 무시하냐?”

잠시 앤이 나간 문을 보는 동안 렌자드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한층 더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무시해?”

“하…….”

지금 렌자드가 화내는 이유는 어머니를 잃은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애잔해지는 건 맞지만 따지고 보면 완전히 내 탓은 아니지 않나?

심지어 소설 속에서 록시나가 죽을 때까지 폭언을 쏟아 내는 걸 보면 아예 어린애일 때 기를 확 잡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맞서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넌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와…….’

생각보다 렌자드의 악담 수준은 훨씬 더 높았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아마 공작가 사람들 모두가 공작 부인을 그리워하고 있는 저택에서, 록시나가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떻게 살았을지 빤히 보였다.

“하! 이제야 좀 주제 파악이 되나 보지?”

록시나에 대한 안타까움에 잠겨 있느라 말이 없는 나를 렌자드는 자신의 말에 수긍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에만 있으라고. 괜히 오늘처럼 나와서 설치지 말고.”

소설 속 록시나는 어릴 적 몸이 아팠고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서술된 정보는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록시나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한 상황에서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원작의 록시나는 저런 폭언을 그냥 묵묵히 듣기만 했을 거라는 거.

“흥! 어쨌건 조심하라고!”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렌자드는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저 헛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니 막막하기도 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참다가 내 몫을 챙겨서 도망칠까?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헤이녹스와 똑닮은 이 외모로 숨어 살기도 그른 것 같다.

그럼 우선 이 저택에서 록시나가 당하는 취급부터 바로잡아야 하는데.

렌자드나 체드만이야 아직 어리니까 지금부터 같이 쏘아 대면 점점 나아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헤이녹스였다. 아내를 잃은 분노를 내뿜고 있는 이 상황이라면 언제든 나를 이 저택에서 내쳐도 할 말이 없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가물가물한 원작의 정보를 끌어모아 헤이녹스에게 내 쓸모를 인정받는 것.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적절히 붙어 있다가 재산을 챙겨서 당당하게 독립하겠어.

탄제리크의 기생충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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