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 시작
나는 버림받았다는 것만 빼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아, 이것부터가 전혀 평범하지 못한가?
나의 부모는 아이가 커 감에도 전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나는 5살이 되던 해 고아원에 버려졌다.
그렇게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들을 키우다시피 하며 간신히 취업까지 했다.
그날도 상사에게 심하게 갈굼을 당하고 11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던 중이었다.
“지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침에 부부싸움이라도 했는지, 상사는 오늘따라 더 예민했다.
서류며 잔심부름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 학원에서 픽업까지 하라며 갑질을 해 대는 바람에 업무가 밀려 야근이 불가피했다.
“에라, 엿이나 먹어라!”
그렇게 상사에게는 닿지도 못할 손가락 욕을 애꿎은 밤하늘에 날리고 있을 때였다.
빵- 빠앙!
한적한 골목길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아야 할 경적이 울렸다.
그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운전자가 보이지 않는 오토바이였다.
“어, 어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오토바이는 속도를 늦출 줄 몰랐고 그대로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인생 거지 같네, 진짜…….”
라고.
1. 록시나 탄제리크가 된다는 건
“으으으…….”
나는 죽은 사람에게 느껴질 리 없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 잡히는 부드러운 천으로 온몸을 둘러쌌음에도 그 사이 촘촘한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찬 공기에 결국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화려한 광경에 넋을 놓았다.
“여기가…… 어띠야?”
헙!
그 순간 들리는 혀 짧은 소리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고 후유증인가?’
가장 그럴듯한 가정을 하고 다시 입을 열어 보았지만, 여전히 새는 발음은 고쳐지지 않았다.
“뭐지, 징짜…….”
그때였다.
똑똑-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문밖으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아직 주무세요?”
‘어떻게 하지?’
아직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건 꺼림칙했다.
‘이대로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면 돌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밖에서 들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나는 다가오는 인기척에도 여전히 이불 속에서 몸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오늘은 늦잠 자시면 안 돼요. 손꼽아 기다리시던 날인데 얼른 일어나셔야죠.”
‘기다리던 날?’
나에게 기다리는 날 같은 건 없었다. 생일은 이 불행의 시작이라 여겨 챙기지 않았고, 산타가 없는 크리스마스 따윈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 내가 기다리던 날이라니?
여자의 알 수 없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결국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셨군요!”
고개를 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은 외국인 여성이었다.
쉬이 볼 수 없는 생김새와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라 나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누, 누구…….”
“아가씨. 장난치실 시간이 없어요. 곧 있으면 공작님이 도착하신다구요!”
‘아가씨……? 공작……?’
여자는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을 하며 나를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세요. 준비는 지금부터 해도 촉박하답니다.”
여자는 싱긋 웃으며 침대 옆에 달린 줄을 당겼다.
그러자 방 안으로 같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두르도록!”
이 방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여자의 지휘하에 세 명의 여자는 내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한 나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 됐어요!”
여자들의 뿌듯함이 잔뜩 묻어난 표정과 함께 내 얼굴에 닿아 있던 손들이 떨어져 나갔다.
“아가씨, 너무 인형 같으세요!”
개중에 가장 어린 듯한 여자가 사각의 거울을 내밀었고, 나는 그 안에 비친 모습에 눈을 크게 키웠다.
‘이게…… 나라고?’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거울 속에 비친 아이도 눈을 크게 떴다.
하얗고 동그란 뺨과 짙은 흑발. 그리고 한국인에게선 쉬이 나올 수 없는 새파란 눈동자.
어릴 적 학교 짝꿍이 부모님이 사 주신 선물이라며 자랑하기 위해 가지고 왔던 인형보다도 더 섬세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난 분명 오토바이에 치여서 죽었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홀린 듯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시녀는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깼다고 생각했는지, 거울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앗……!”
“오늘은 방에만 계시면 안 돼요. 공작님께서 방금 저택 정문을 통과하셨대요!”
정말 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서두르는 바람에 나는 이 놀라운 외모를 더 감상하지 못하고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우와…….”
행여나 늦을까 전전긍긍하는 시녀를 따라 방을 나오자, 높은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 버건디색으로 도배된 복도가 보였다.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계단이 층을 잇고 있었고, 고풍스러운 초상화, 풍경화들은 본래 벽지와 하나인 듯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내가 저택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빠르게 내딛던 여자가 손짓했다.
“아가씨,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커다란 홀에는 시녀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문 사람도, 예의 바른 미소를 걸고 고개를 숙인 사람도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깔린 카펫을 기준으로 양옆에 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드라마에서만 보던 회장 취임식을 연상케 했다.
“아, 아가씨께서 어쩐 일로…….”
나와 가까이에 서 있던 남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커다란 문이 열렸다.
문 틈새로 역광이 들어옴과 동시에 사람들이 머리를 숙였다.
“탄제리크가의 가주, 헤이녹스 탄제리크 공작님을 뵙습니다.”
‘뭐?’
헤이녹스 탄제리크. 어딘지 익숙한 이름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그건 바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 ‘그 꽃을 꺾지 마세요’에 나왔던 흑막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영웅이자 황가의 견제를 받을 정도로 위세를 떨치는 탄제리크는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주, 1황자의 황위 승계를 막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아마 1황자가 황제가 되면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이 헤이녹스 탄제리크란 말이지? 그럼 여긴 소설 속인 거고?’
하나하나 상황을 되짚으며 파악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고개를 숙이셔야 해요!”
등을 누르는 손길에 여자의 다리에 콩하고 이마를 찧은 나는 잘게 떨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를 드리운 커다란 실루엣을 눈에 담으려 미간을 찌푸리자 점점 사람의 형체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짧은 목을 한참이나 꺾어 마주한 것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이었다.
“저건 뭐지?”
아니, 저거?
아무리 흑막이고 무시무시한 공작이라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한테 뭐라고?
과거,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외쳤다.
“말이 심하시네여!”
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내게 말이 심하다고 한 건가?”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시녀는 가늘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겨우 나를 보호했다.
“고, 공녀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죄송합니다.”
뭐라는 거야, 뭘 잘못했는데!
아무리 소설 속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려졌던 사람이라지만 바로 몇 시간 전에 죽음을 맞이했던 내게 겁날 건 없었다.
오히려 여전히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공작의 태도 위로 상사의 모습이 겹치며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저 앙 어려요!”
마음과 다르게 여전히 형편없는 발음은 고쳐지지 않았지만.
“어리지 않다……?”
그때 공작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네! 저 앙 어려요! 생깅 건 말짱해 가지곤 아주 무례하시네여!”
사심이 섞인 말이긴 했지만 상사에게 이렇게 시원하게 퍼부어 보는 게 소원이었던 터라 막힘없이 쏘아 댔다.
“무례하다라…….”
책에서 묘사되던 차가운 비소가 저런 걸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등 뒤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아, 망한 건가.
옆에 서 있던 여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진짜 무례한 게 누군지 모르겠군.”
그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 다시 한번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퇴가 내려지려나.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눈을 꼭 감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말이야.”
……아버지?
낯선 호칭에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다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눈, 짙은 흑발.
지금 이 몸과 흡사한 생김새.
그리고 아까 바들바들 떨던 시녀가 했던 말, 공녀님.
“헉!”
뒤늦게 걸음을 물리려 하자 공작은 느릿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군.”
‘말도 안 돼.’
“제 아비가.”
‘지금 나 록시나 탄제리크가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