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에필로그.
<늘 감사하고 보고 싶은 사장님께.
사장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지금 에르도안 영지는 여름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아일라의 편지를 천천히 읽으며 나는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아일라는 북부에서 큰 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아일라가 북부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리카르도가 나에 대한 안부를 묻고 있다는 이야기로 편지는 끝을 맺었다.
나는 종이를 꺼내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을 쓰기 시작했다.
미묘하게 원작과 이야기가 다르지만, 각자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못해 당혹스러운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던 이야기가 이렇게라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아…….”
아침 햇살에 환해진 집무실을 보며 나는 나른한 하품을 내뱉었다.
슬쩍 내 앞의 책상을 보니 서류 더미가 아직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유감스러운 사실은 이게 내가 어제 하다 만 일거리가 아니라, 오늘 새로 갱신이 된 일감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가주 일을 빨리 인계하고 싶어 하는 탓에 일이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 어디 안 도망가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공작위를 물려줘서 공작성에 붙잡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후계위도 금방 승계를 받았고, 나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작 후계위를 두 번이나 일임받은 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베로니카 황녀, 아니, 황제의 덕이 컸다.
그녀가 교황이 보낸 증언서에서 영혼이 바뀐 인물이 나라는 것을,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 흘러가는 걸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막아줬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면 나는 카시어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똑똑.
“들어오세요.”
“저…….”
문틈으로 빼꼼 작은 머리가 보였다. 나와 같이 붉은 기가 감도는 금색 머리를 가진 소년이 문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님, 아침 드시래요.”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로디안은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자신과 빼닮은 사람을 보았는지 놀란 눈치였으나 곧 나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친밀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내가 공식적으로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자, 로디안은 나를 누나가 아닌, 누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딴엔 나를 존칭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7살짜리 애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영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침은…… 오늘 일이 있어서 못 먹을 것 같다고 이야기 전해줘.”
“네에….”
그를 연회장에서 만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동생인 로디안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애가 이렇게 금방 크다니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처음 이 세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는 참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건만, 다 크고 보니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도.
“올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시계를 보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었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람.
“기다렸어?”
산뜻한 꽃내음이 실내에 감돌았다. 시선을 돌리자 바다색 머리와 연두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무슨 약병 같은데. 그 안에는 노란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아, 이거? 로엔 줄려고 만들었지. 한번 마셔봐.”
얼떨결에 그 병을 받아든 나는 병을 열어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묘하게 익숙한 향기였다.
“이거…… 이상한 거 아니야? 나 실험군은 아니지?”
“이미 실험군은 다 거쳐 갔어.”
“……그래? 이걸 주려고 시간을 잡은 거야?”
“응.”
나는 엘렌을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액체를 살짝 맛보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이라 생각했는데, 전생에서 먹었던 피로 회복제랑 같은 맛이었다.
“로엔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번 만들어봤어.”
“와, 혼자 만든 거야?”
“도안은 내가 만들었고, 그밖에는 수십 명의 인력이 들어가긴 했지.”
“대체 얼마나 사람을 굴린 거야.”
“일주일 정도?”
얼마 안 걸린 시간이긴 하지만, 저런 악덕 사장 같은 애한테 걸려서 마법사들도 참 안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이 병에 든 약효를 확실히 알게 된 나는 안심하며 한 번에 병에 든 액체를 다 마셨다.
목 넘김은 나쁘지 않았다. 익숙한 맛에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라?”
어. 아까부터 피로로 묵직했던 눈꺼풀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 자세로 오래 일을 하다 보니 돌덩이라도 얹은 듯 딱딱했던 어깨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생에서 먹었던 피로 회복제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은데?
신묘한 약 기운에 번뜩 한 가지 기막힌 생각이 스쳤다. 나는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이거 아이템이다. 사업 아이템. 엘렌, 이거 파는 거 어때?”
“재료비가 10만 실링인데?”
“농담이지?”
“아니. 나 지금 완전히 청렴결백해.”
아니, 무슨 액체의 재료비가 금값이여. 이걸 팔았다간 마진은커녕 재료비로 파산할 성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마신 액체도 재료비가 들었을 텐데, 그 돈은 어디서 생긴 거지?
“마탑에 돈 없잖아.”
“곳간에 있던데?”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진짜 너……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
“벼룩의 간을 어떻게 빼?”
엘렌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내 돈을 써. 나 돈 많아.”
“나도 많은데?”
엘렌의 반문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응, 최근에 밖을 좀 돌아다니다가 바다에 잠긴 큰 보석함을 발견했거든. 여러 개.”
나는 최근에 신문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 난파당했던 무역 배를 떠올렸다. 그 배에는 타국에서 우리 제국으로 넘어오던 외교관들도 몇몇 있었다고 했는데….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지.”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에게 반박했다.
“그거 범죄야. 근데 잠깐.”
나는 손에 든 약병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놀라운 약 효과에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이거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이고 파는 건 어떨까? 그러면 값을 비싸게 부를 수 있으니까 마진은 남을 것 같은데…….”
효과도 비슷하니까 들킬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엘렌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범죄가 아니고?”
그의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나를 뭉근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엔, 하나 잊지 않았어?”
그가 말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약병에 닿아 있었다. 나는 뭐가? 하고 반사적으로 물으려고 했다가 아- 탄식을 흘렸다.
나를 보는 엘렌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이 나고 있었다.
“고마워. 나를 위해 만들어줬다니 감동이구나.”
“교과서 읽는 말투로 말하니, 나 또한 보람이 느껴지는구나.”
나와 같은 말투로 대답한 그의 시선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아, 미안하다니까. 정말 고마워, 됐지?”
“고마우면.”
그가 자신의 뺨 한쪽을 톡톡 검지로 두들겼다. 나는 그의 행동을 가늘게 눈을 뜨며 지켜보았다.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정말이지.’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은 나는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런 다음, 빠르게 몸을 후다닥 뒤로 물렸다. 아, 진짜 오전부터 내가 뭐 하는 거람.
나는 그가 괜한 오해를 할 성싶어 급히 변명했다.
“고, 고맙다는 인사야. 알지? 네가 저번에 나한테 했던 거.”
“그런 인사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데?”
“너……!”
어쩐지 다른 나라 문화법을 찾아도 그런 인사법은 없더니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은 토마토마냥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엘렌이 즐거운 얼굴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보고, 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나는 손등을 화끈거리는 두 뺨에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럼 나 혼자 갈까?”
그의 말에 깊이 고민하던 나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같이 가.”
내 말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그 순간, 내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청량하고 맑은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갔다가 나왔다.
내 시야에는 서류가 잔뜩 어질러 있는 답답한 집무실 대신 빽빽한 나무들이 보였다.
나무 사이로는 새들이 날아다니며 귀엽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와 손을 잡고 나는 아침마다 숲을 산책했다.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엘렌이 미소를 짓는 나를 보며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 또한 그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이 웃음을 그와 오래도록 마주하고 싶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