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피잉!
맨눈으론 감당하기 힘든 빛무리가 마도구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위에서 달빛이 비추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운 실내에 눈이 익숙해진 상태에선 너무도 자극적이고 강한 빛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내 팔을 끌어 품 안에 잡아당겼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익숙한 풀과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환했던 만큼 빛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우웅.
마도구가 일정한 공명을 내며 점차 어두워졌다.
나는 급히 엘렌의 품에서 나와 주위를 살폈다.
내 눈에 쓰러진 황태자와 베로니카 황녀가 들어왔다.
“전하!”
나는 급히 베로니카 황녀에게 다가갔다. 고대 마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의문보다는 의식을 잃은 그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숨은 잘 쉬고 있었다. 어깨를 흔들자 황녀의 얇은 입술에서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음…….”
베로니카 황녀가 눈을 떴다. 안도의 한숨을 뱉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몽롱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정신이 드는지 황녀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쓰러진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또한 베로니카 황녀처럼 쓰러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그를 보며 엘렌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죽은 거야?”
“아니.”
“그러면?”
“잠들었어.”
엘렌이 일주일 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던 마법이 황태자한테는 잠만 자게 만든다는 게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입안이 모래라도 씹은 듯 까끌까끌했다. 베로니카 황녀는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방 깨어나지는 못하겠죠.”
“평생.”
엘렌이 황녀의 말을 받았다. 그의 말을 듣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곤히 잠든 모습 같은데…… 깨어나질 못한다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반쯤 몸을 일으킨 황녀가 착잡한 시선으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황태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소설 속 아일라가 설인을 봉인했던 장면을 떠올린 나는 침음을 흘렸다. 설인은 그녀에 의해 힘을 제어 당한 게 아닌, 억지로 의식을 빼앗겨 행동을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일이 잘 해결된 게 맞는 걸까.
기뻐해야 하건만 작은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온몸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느덧 수직으로 비추던 달은 구름 속에 묻혀, 제단은 어둠에 잠식했다.
* * *
공작령의 추운 기운이 완연히 없어지고, 따뜻한 봄을 알리는 장미꽃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날씨 좋다…….”
아무리 일 중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좋은 날씨에 밖에도 못 나가고 몇 주 동안 집무실에 박혀 서류만 보는 것도 할 짓이 못되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공녀님,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오늘은 처리할 서류가 많으니 아침은 괜찮아요.”
“하지만 마님께서 꼭 아침은 드시게 하라고…….”
“어머니께는 제가 알아서 잘 설명해 드릴게요.”
사무실에 출근할 때마다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이 들어, 오히려 아침을 먹으면 거북해지는 몸이 되어버렸다. 공작령에 들어온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
공작저로 들어오면서 일은 훨씬 많아졌다. 후계위를 다시 인계받아 아버지가 맡았던 일까지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온이랑 아일라도 고생이네.’
돈으로 샀다고 하지만, 마르그리트 백작위는 백작령을 얻으면서 하사받은 공식적인 직위였다. 그래서 나는 카시어스 공작의 후계자로서 일도 해야 했고, 마르그리트 백작의 일도 맡아서 해야 했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해보고 이게 정녕 사람이 할 짓이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일복이 터진 건 좋지만, 이러다 죽겠다 싶어 고민 끝에 백작령의 일은 일시적으로 리온과 아일라에게 맡겼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탁상 달력에 시선을 돌린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느 숲에서 또 뒹굴기라도 했는지 엘렌의 옷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이 황제 즉위식이잖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뭐?!”
나는 깜짝 놀라 달력을 살펴보았다. 대충 이맘때쯤에 즉위식이 열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 어질러진 서류철을 정리했다.
“어떡하지…….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다시-”
엘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해야 하는데…….”
그대로 그와 함께 황궁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하던 말을 흐렸다.
“그런 거 안 해도 로엔은 멋지니까 괜찮아.”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엘렌의 얼굴에 주먹이 나갈 뻔했다.
황제의 즉위식인데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추어야지!
그렇게 입을 벌리려는데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랑 싸움을 하려면 나가서 할래요?”
특유의 무료함이 묻어나는 건조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두 달 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곧바로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달은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설마-”
“황족들만 들어올 수 있는 휴게실이에요. 지금은 궁에 남아 있는 황족이 나뿐이라 내 전용이나 다름이 없지만요. 참 쾌적하고 좋죠?”
그녀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엘렌의 뒤통수를 누르며 함께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사람 많은 거 싫으면 여기 있어요. 지금 밖에 귀족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거든요.”
“그래? 그러면 실례 좀.”
엘렌이 다른 의자에 앉아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지금 황궁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황태자가 깨어나지 못하는 잠에 빠진 이후,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교황이 쓴 증언서의 내용에서 금기를 저지른 사람이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라고 발고했기 때문이다.
이미 황태자는 고대 마도구에 당해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황제 또한 자작극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잇따라 반란군을 권력의 세습을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제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흐름에 따라 아버지는 황녀를 황위에 올려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귀족 사회는 술렁거렸다. 귀족파의 수장인 아버지의 강한 주장에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한목소리를 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의식을 잃었다가 막 깨어난 사람인 양 행동하던 황제도 책임을 면피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현재로서는 어떤 마법사가 와도 황태자를 깨울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베로니카는 황태자가 되었고, 본래라면 황태자였던 폐태자가 즉위를 물려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녀가 대신 즉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나는 엘렌을 보았다. 폐태자를 깨울 수 있는 사람은 엘렌이 세상에서 유일했다.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했다.
“태자 전하. 축하드립니다.”
나는 뒤늦게 인사하며 이제는 황태자가 된 베로니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베로니카도 마주 웃으며 고맙다 말했다. 웃는 모습이 약간 씁쓸해 보였지만, 이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즉위식은 비교적 조용하게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아일라를 만났다. 은색 머리를 땋아 내린 그녀가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맑고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 다크써클까지 내려온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일라, 그간 잘 지내고 있었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일이 너무 많더라도 쉬엄쉬엄하며 일하세요.”
끝까지 일은 하지 말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아일라가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사장님도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똑같은 처지니까요.”
나는 아일라와 함께 웃으며 대화했다.
“아 참, 사장님. 하실 부탁이란 게 뭔가요?”
“아일라, 예전에 북부에 있는 공작성이 궁금하다고 했죠?”
“네? 네, 그랬었죠.”
“아일라가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생길 것 같아요.”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 다가오는 겨울에 설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나는 그간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아일라에게 북부로 출장을 가서 설인을 봉인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마물이 많은 곳이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물론 에르도안 공작님이 아일라를 최대한 지켜줄 거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천천히 고민해줘요.”
나는 리카르도에게 먼저 그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 제안을 승낙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일라의 의사였다. 그녀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가 활짝 웃고는 쾌활하게 답했다.
“제가 사장님께 입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눈의 요정을 제 눈으로 직접 볼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