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습습하면서 서늘한 공기가 오래된 흙냄새와 함께 성소의 안을 배회했다. 베로니카 황녀는 엘렌이 준 광원구를 들고 불을 켰다.
잔잔하게 비치는 불을 들고 그녀는 복도를 걸었다. 수분이 침윤한 나무 벽면에서 나무 특유의 냄새와 오래 청소되지 않은 쾨쾨함이 섞여 코안에 머물렀다.
그녀는 교황이 일러준 약도대로 제단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걷는 내내 보지 못했던, 가장 큰 문이 있었다. 낡은 철문이라 혼자 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열기 쉬웠다.
‘여기가 이젤로의 제단.’
제단에 들어서자 아까 숲속에서 느꼈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제단이 있는 방 위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어서 달빛이 제단을 수직으로 비추고 있었다.
제단을 둘러보던 베로니카 황녀는 커다란 석상을 발견했다.
거대한 뱀 같은 용이 똬리를 튼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기분 나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황족을 비호한다는 신의 모습인가.’
책으로 보았던 모습보다 더 악귀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사람의 영혼과 바로 죽은 뱀의 사체가 제물이라고 했으니 신보다는 악귀라고 하는 것이 맞아 보이는데.
베로니카는 신화와 여태까지의 일을 떠올리며 석상을 관조했다.
그녀는 석상 뒤에 앉아 발걸음에 귀를 기울였다.
안셀모라면, 기사들을 앞세워 전투를 치르게 하고 홀로 제단에 들어올 것이다. 베로니카는 확신했다.
-터벅.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검을 쥔 그녀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석상 너머로 고개를 살짝 빼서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탄식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길 바랐건만, 그녀가 예상한 대로 익숙한 인영이었다.
“먼저 불청객이 와 있군.”
안셀모의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로니카는 숨죽였다. 엘렌 알렉산드로의 설명으로는 고대 마도구를 사용할 때 특이한 조건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고대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일라 레니에, 그리고 안셀모.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카시어스 공녀와 알렉산드로 대공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짐작되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시간의 역행을 기억하는 자.’
베로니카는 자신의 판단으로 도박을 한번 해보는 걸 결심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어.’
안셀모가 여기까지 왔다면, 시간을 돌린 후 자신을 제거하려고 할 터였다. 모처럼 얻은 두 번째 인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야. 안셀모.”
“……죽고 싶구나.”
안셀모의 눈빛이 아까 밖에서 느꼈던 밤바람보다 더 차게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죽고 싶었다면 동생이 선물한 단두대에 목이 잘릴 때까지 얌전히 감옥에 있었겠지.”
“그러면 조금 더 얌전히 기다리지 그랬어.”
여유로웠던 그의 미소가 경멸과 짜증이 섞여 들어가자 천천히 뒤틀렸다. 여러 겹 쓴 가면이 몇 꺼풀이 벗겨진 것처럼 서서히 얇아지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아프지 않게 죽여줬을 텐데. 저번 생에는 얌전하게 잘 있었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베로니카는 그 물음에 진심으로 답하려다가 관두었다. 늘 황위는 당연히 제 것이라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누이였던 그녀조차 그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난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지는 않는 성미거든. 너도 알고 있잖아? 매번 똑같은 걸 반복하는 건 나한텐 지루한 일이라는 거.”
“하.”
그녀의 대답에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왜인지 그녀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누님은 이게 놀이로 보이지?”
베로니카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고, 미소는 흔적을 감추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날 증오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러면 진작 네 뜻대로 죽어줬을지도 모르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베로니카의 시선이 안셀모의 손에 닿았다. 안셀모가 마도구를 사용하기 전에 그의 손에서 뺏어야만 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그가 귀찮지만 들어주겠다는 듯 턱짓으로 까닥였다.
“왜 돌아오자마자 날 죽이지 않았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카는 잠깐 대답을 기다리다가 말을 이었다.
“알고 있잖아. 황실의 금기를 저지르면 폐하는 물론이고, 나 또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걸. 내가 너라면 나부터 죽였을 거야.”
“…….”
안셀모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면서도 얌전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니?”
“내 오판이었지. 이제 그 실수를 바로 잡으려 하는 중이고.”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가 흉흉한 빛을 띠었다. 안셀모가 왼쪽 손을 움직였다. 베로니카는 재빨리 그의 손에 있는 마도구를 향해 달려갔다.
안셀모는 간발의 차로 베로니카에게서 몸을 피했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튀었다. 마도구에서부터 쨍한 빛이 나왔다. 그 순간, 베로니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 * *
“저거…… 괜찮을까?”
“아무렴.”
나는 기사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리어스 기사들은 엘렌에 의해 얼음으로 온몸이 결박되어 있었다. 숨구멍만 빼놓고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인 꼴이었기에 저러다가 저체온증으로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엘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리를 죽이려고 했는데, 저체온증으로 죽으면 자기 팔자지. 뭐.”
“그리고 리카르도는…….”
“괜한 걱정이지.”
엘렌이 말했다.
“성기사가 뒤늦게 도착해서 그들이랑 함께 마리어스 기사랑 싸우고 있어. 그리고 로엔.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사람이 있잖아?”
“아, 맞아. 황녀 전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엘렌이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쨍한 빛에 눈이 부셨다.
황태자가 베로니카에게 마도구를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엘렌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하! 괜찮으세요?”
나는 급하게 베로니카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다친 부분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베로니카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던 나는 몸을 일으키고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이제 다 끝났어요.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안타깝군요, 공녀.”
황태자가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실리에 밝아 좋은 사업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오였던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황궁으로 돌아가도 달라질 게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그가 한 말의 뜻을 파악한 내 눈엔 힘이 들어갔다. 지금 황태자는 ‘우리 빼고 모든 사람이 내 편이다.’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없었지만, 열이 받았다.
“교황 성하께서 정식으로 이 일에 대해 증언서를 제출하실 겁니다.”
“증언서 따위가 날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을 겁박해서 증언서를 조작했다는 주장을 하면, 불리해지는 건 그쪽일 터인데.”
“그래도 원로회에서 에르도안 공작님이나 베로니카 황녀 전하를 후보로 올리는 구실이 생기지 않겠어요?”
궁전에 있는 중앙 원로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황태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나를 보는 황태자의 시선에 분노가 묻어났다.
황제와 원로회는 서로 의견이 합치될 때도 있지만, 다른 주장으로 부딪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특히나 황위를 잇는 후계자 건에 대해선 완전히 양립했다. 원로회가 후계 건에 대해서 주장하는 바는 이와 같았다.
‘황위 계승권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독점을 해서는 안 된다.’
리카르도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모두 승전보를 전했을 땐 원로회의 이러한 주장에 더 힘이 실렸다. 제왕으로서 재능이 있는 자가 황위에 오름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원로회의 중추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나는 그 말에 중추가 누구였는지 상기했다.
‘알렉산드로 대공.’
그렇지만, 그는 황태자에게 엘렌의 능력을 밝히면서 암묵적으로 황태자의 일에 동조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목 뒤가 빳빳해졌다. 황태자의 시선이 엘렌에게 닿았다. 엘렌은 차갑게 그를 응시했다.
“그게 실효성 없는 이야기라는 건 누구보다 대공자가 잘 알고 있겠군요.”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눈앞이 컴컴해졌다. 이대로 황태자가 시간을 돌리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베로니카 황녀가 황태자의 손에서 고대 마도구를 빼앗았고, 그녀의 손에 들린 마도구가 찬연한 빛을 환하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