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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20화 (121/124)

120화

나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뭐?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야!”

아까 황태자를 찾는다던 성기사들과 마리어스 기사들, 그리고 리카르도가 아직 숲 안에 있었다. 베로니카 황녀가 건조한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만 없다면 나쁘진 않은 생각이네요.”

“아뇨, 전하. 저는 완전 나쁜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제단이랑 성소들이 있는데 불에 타서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묵직해졌다. 머릿속에 숨겨두었던 계산기가 오랜만에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신전에서 우리 앞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손해배상으로 청구하겠지. 심지어 성물이나 성물은 값어치를 정확히 책정할 수 없다.

그 말은 교황청 쪽에서 부르는 값이 곧 그것들의 값이라는 뜻이 되었다. 마탑에서 쓸 돈도 없는 거지 대마법사인 엘렌이 그 값을 치르기는 힘들 것이고, 결국 나나 베로니카 황녀가 그 값을 물어야 할 텐데.

“제단은 불타지 않아요.”

베로니카 황녀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단이 물리적인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거라면, 안셀모를 찾기보단 제단을 찾아 없애는 쪽이 이야기가 빠르잖아요. 후환도 없고.”

그 후환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맞는 말이었다.

당장 일을 해결한다는 것만 놓고 본다면 베로니카 황녀의 말이 옳았다. 제단을 없애면 뱀과 영혼이 제물로 바쳐질 곳도 사라지는 거였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신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니까요. 여기를 직접 신이 와서 없애거나, 신을 초월하는 힘을 쓰지 않는 이상 이 성소를 무너뜨리거나 불태우는 건 힘들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길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뱉자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퍼져나갔다.

“그러면 여기서 보초를 서는 방법밖에는 없겠네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갑자기 인기척 소리가 들려 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황태자인가?

“역시, 이쪽에 마법사가 있어서 먼저 출발했는데도 한발 빠르군.”

익숙한 금색 머리와 금색안을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엘렌을 보고 있었다.

“그대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자인데, 안타깝게 되었어. 원래 자식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지.”

그게 무슨 뜻이지?

황태자가 한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이 엘렌을 향한 말임은 확실했다.

한편으론 말의 뉘앙스가 알렉산드로 대공과 황태자가 결탁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분이 아닌데 내가 무슨 상상을.

만약 누군가를 이간질하거나 교란을 시킬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황태자에게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엘렌은 아까부터 의미 모를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시선을 둘 때가 아닌데도.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마리어스 기사들이 한둘씩 나와 황태자를 에워쌌다. 황태자를 붙잡으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보호하기 위함처럼 보였다. 황태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 마법사는 나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가 하얀 이를 슬쩍 보이며 웃었다. 그의 손에 못 보던 물건이 있었다. 독특하게 생긴 조각상이었다. 하얀 표범이 칼을 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게 왜 등장하지 않나 했지.”

엘렌이 차가운 비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특히 마법사들에게 효과가 좋은데, 이걸 놓고 다닐 수는 없지 않나?”

황태자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엘렌의 보온 마법이 있음에도 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저것이 바로 고대 마도구. 소설에 서술된 그대로의 생김새였다.

“안셀모.”

“아-”

황태자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의외라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네. 누님.”

“그래, 친애하는 동생 덕분에.”

그녀의 답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를 보는 베로니카 황녀의 눈빛은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나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황위는 자연스럽게 네 차지였을 텐데.”

“불안의 싹은 살려두지 않는 편이라-”

황태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이상, 살려둘 수는 없지.”

황태자가 마리어스 기사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는 내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절제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를 이 자리에서 죽이려 하고 있었다.

엘렌은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선두에 선 기사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손목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가는 팔찌가 있었다.

“꽤나 조악한 마도구를 쓰고 있네.”

“마도구라니?”

“마법 보호구야. 물리적인 힘보다는 마법 같은 마력이 사용되는 힘에 저항력을 키우는 물건이지.”

여기 올 때부터 엘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엘렌은 기분이 몹시 나쁜지 한껏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엔, 내 손 잡는 거 잊지 마.”

“어, 응.”

나도 모르게 끄덕였으나, 무언가 불길했다. 잘 밟고 있던 땅이 아래로 우묵하게 꺼지는 것처럼 발밑이 허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헉! 미친!”

어느새 나와 엘렌은 공중에 떠 있었다. 기사들이 장난감 병정처럼 보일 정도로 작게 보이는 위치였다. 고소공포증은 없었지만, 떨어지면 죽는다는 원초적인 공포심에 허우적거리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미리 예고나 해주면 덧나나?!”

“황태자가 어디 있는지 보여?”

그는 놀라는 날 무시하며 이마에 손을 올린 채 황태자를 찾고 있었다. 그를 따라 아까 황태자가 있던 자리에 시선을 옮겼다.

“…어디 갔지?”

나는 그의 말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황태자가 그 자리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단으로 간 건가?’

“아마 그게 맞을걸.”

엘렌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한 거야?”

“베로니카 황녀를 제단 안으로 옮겼지.”

“뭐…?”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냐, 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엘렌을 보았다.

“황녀가 원하던 거였어.”

“하지만 황태자와 단둘이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위험해.”

벌써 황태자와 맞닥뜨린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런데 엘렌의 시선이 문득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좇았다. 그런데 그쪽에는 리카르도가 있었다. 정확히는 숲에 남은 마리어스 기사들과 리카르도가 검을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일 대 다수인 상황으로 수적으로는 리카르도가 열세였지만,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실 줄은 몰랐네.”

엘렌이 서늘하게 웃었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 아버지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응.”

“아까 신전에 들어왔던 마리어스 기사들의 생각을 읽었을 때, 황태자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없었어. 하지만 지금 숲에 보이는 마리어스 기사들은 황태자가 제단으로 가는 길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거야. 신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렇다면…… 황태자가 네 능력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그렇게 되겠지.”

하얀 도화지 같은 그의 얼굴에 온기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대체 어떤 수로 황태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통찰을 알고 있는 사람은 최근에 알게 된 황녀를 제외하면 나와 대공 부부밖에 없었다.

“그럼 소용없다는 말의 의미가…….”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헙,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했다.

“일단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우리는 황녀님한테 가볼까? 먼저 이 잔챙이들을 처리하고.”

차르르, 유리를 긁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 아래에서 얼음 결정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공중에서 마리어스 기사들에게 얼음 마법을 쏘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와아,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와, 우리 되게 비겁해 보이는데?”

“원래 정당한 승부 같은 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거지.”

그가 턱짓으로 까닥했다. 리카르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하기는…….’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딱히 정당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정예 기사들을 혼자서 열 명이나 상대하고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리카르도는 난공불락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점점 날카로워지는 얼음의 형태에 엘렌을 붙잡았다.

“죽이지는 마.”

“아무렴. 나 그렇게 잔인하고 무도한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뾰족했던 얼음들이 둥글게 변했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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