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지독한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닐 수도 있어요.”
“……?”
치료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굳이 시간을 돌릴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는 많아.”
엘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지. 황녀님의 행동력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증언서를 들고 가도 서류 수리가 될 가능성은 없잖아. 폐하도 황태자의 행동에 동조하고 있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이게 제일 깨끗한 방법이니까.”
베로니카 황녀가 말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선 안셀모가 우위에 있지만, 시간을 돌리는 편이 깔끔해요. 왜냐면 이 금기에 대해 알아선 안 되는 사람이 알았기 때문이죠.”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대마법사인 엘렌 알렉산드로와 사촌인 리카르도 에르도안.”
황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상태로 시간을 돌리게 되면, 이 시간의 역행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와 아버지밖에 없겠죠.”
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 또한 이 모든 일을 잊고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어딘가 무고한 사람의 영혼이 희생될 터였다.
그리고 그게 다시 한번 내가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엘렌이 될 수도 있었다.
“엘렌 알렉산드로, 날 안셀모한테 데려다줘요.”
“황녀님이 가서 뭐 하게?”
엘렌이 물었다. 가봤자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건전하고 평화로운 대화.”
어떤 대화를 하려고…….
베로니카 황녀의 말에 불안해졌지만,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치료실 문 너머로 이쪽을 보던 사제들이 치료실로 들어왔다.
“성하, 어떻게 된 일인가요?”
사제들이 묻기 시작했다. 교황은 여태까지 있던 일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중에 내 영혼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대로 함구할 생각인가?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어쩐지 얼굴이 따가웠다. 내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안 했을 뿐, 베로니카 황녀에게 당한 일은 몽땅 말했는지 사제들이 이쪽을 보는 시선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늦은 사과지만, 먼저 사과해줘서 고맙습니다.”
다른 사제들에게 성력 치료를 받고 있던 교황이 말했다. 저 독이 성력으로 치료가 되는 거라면 스스로 성력을 이용해 치료를 할 수 있지 않나?
“자신의 성력까지 막아버리는 독에 당했지만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력까지 저지시키는 독이라.
베로니카 황녀가 여기 올 때부터 작정하고 온 게 틀림없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내심 그가 직접 황실에 가서 증언서를 제출해준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황을 설득하고 싶지만, 그가 도울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나를 이단으로 발고할 눈치를 보여 베로니카 황녀가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하물며 교황이 증언서를 가지러 가는 길에 엘렌이 따라간 걸 보아선…….
‘교황이 개입할 가능성은 버려야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도는 역시 하나였다. 황태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그를 죽이는 것.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내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교황에게 다가갔다.
“성하…….”
이제는 내 스스로가 궁색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 일당은 그들에게 악당 무리나 다름이 없을 게 분명할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가 말을 걸자마자, 교황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증언서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직접 증언서를 제출해달라 부탁했다. 금방 거절의 말이 나올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는 입을 다문 채 고심했다. 엘렌과 베로니카 황녀도 이쪽을 보며 교황의 대답을 기다렸다.
교황은 무거운 숨을 뱉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네. 네?”
당연히 곤란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교황이 알겠다고 말했다. 나는 혹시 그가 나중에 가서 다른 말을 할까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성하께서 증언서를 직접 제출해주신다고요?”
“네. 신전 측에서도 이 일을 아는 이상 묵과할 수만은 없습니다.”
얼굴은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시선이 베로니카 황녀에게 가 있었다.
‘뒤끝이 있으시네.’
방금 독침에 찔렸는데 깔끔히 잊고, 하하 호호 지내는 일도 무리긴 했다.
그를 보는 베로니카 황녀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그의 말을 반길 줄 알았던 그녀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돌려지면 무용지물이겠죠.”
그녀가 말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안셀모는 제일 먼저 저를 제거할 테니 일이 쉽게 돌아가겠네요.”
“엘렌. 우리를 빨리 황태자한테 데려다줘.”
마음이 급해졌다. 내 말에 엘렌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엔, 너도?”
“왜 나는 안 되는데.”
나는 그가 묻는 것이 곧 거절이라는 걸 깨닫고 바로 반박했다.
“설마 나 몰래 또 일을 치르려는 건 아니지?”
엘렌이 생사람을 잡는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런 거 본 적 있어?”
“응. 엄청 많이 봤어. 너 불안해서 황녀 전하랑 단둘이 못 보내.”
“내가 걱정되는구나?”
엘렌이 배시시 웃었다. 얄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원래 모습이 아니라 자칫하면 어린아이를 때리는 불한당 취급을 받기에 십상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입씨름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줘.”
마주 잡는 손이 뜨거웠다. 엘렌이 마주 잡은 손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눈동자에 그를 마주 보는 내가 있었다.
“이 손만 안 놓으면 괜찮을 것 같아.”
천연스러우면서 장난스럽게 툭 던지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 손만 안 놓으면 따라가게 해준다는 거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잔뜩 붉어진 채로.
그런데 어딘가 미미하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한데, 아직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베로니카 황녀였다.
“제단은 여러 개지만, 클로비스 제국이 모시는 신의 제단은 딱 하나예요.”
그녀는 방금 교황에게 건네받았던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각각의 제단에는 모시는 신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이젤로.’라고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고 현재 우리가 있는 지점을 쭉 그었다.
“북서쪽 30도 방향. 숲 입구를 기준으로 거리는 약 2.4km 되겠네요.”
그 순간,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 * *
초봄이지만, 밤중의 숲속은 여전히 추웠다. 차가운 바람에 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엘렌의 손에서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온몸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오면서 변신 마법을 푼 그의 손은 원래 크기대로 돌아와 내 손을 감쌀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손이 커져 있었지.’
생경하면서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어린 시절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내 손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는 손을 보니 괜히 부끄러워져 주위를 살피는 척 입을 열었다.
“한밤중이라 너무 어두운데….”
“그럼 숲 전체에 빛을 밝힐까?”
“그게 가능해?”
“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러면 우리의 위치까지 발각될 거야. 그러다가 황태자가 먼저 이쪽을 발견하면, 마도구를 사용하겠지.”
고대 마도구. 설인까지 봉인할 수 있다고 하는 강력한 마법 도구였다. 엘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 논외로 치지만, 나나 황녀는 그 마법에 노출되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혹시 위치 추적 마법 같은 건 없어? 저번처럼.”
저번에 황태자의 자객에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엘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있긴 한데…….”
말을 흐리는 걸 보아선 예사로운 방식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마법을 건 물건을 상대가 가지고 있어야 해.”
마법을 건 물건?
위치 추적기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참 신기하고 유용한 마법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이상했다.
“잠깐만. 나한테 그런 물건이 있다고?”
내 말에 그의 시선이 내 손을 향했다.
내 손에는 기혼자로 위장하려고 낀 반지밖에는 없었다. 설마, 이 반지에?
“거기에 방어 마법도 같이 걸었지.”
엘렌이 뻔뻔한 미소를 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내 눈앞에 올 수 있었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니.
“그러면 이 어두운 숲에서 어떻게 찾는담…….”
황태자에게 접근하자마자 고대 마도구에 당해 정신을 잃었던 엘렌이 황태자의 물건에 위치 추적을 하는 마법을 걸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숲속을 걸어 다니며 수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렌이 말했다.
“숲을 모두 불태우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