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돌직구 같은 황녀의 말에 바짝 긴장한 건 나였다.
신전에 오기 전부터 평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옆에 있는 일만으로 피곤한 일이 연달아 터질 줄이야.
나는 긴장한 시선으로 교황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음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공기가 언제 깨질지 몰라 속이 탔다.
교황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심연처럼 어둡고 깊은 리카르도의 눈동자와는 달리 색채감이 옅어 하늘색에 가까운 눈동자였다. 마치 엘렌의 머리 색처럼.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계속 노크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성하! 계십니까!”
점점 커지는 노크 소리는 곧 있으면 문을 부실 것 같아서 초조한 마음이었다. 차라리 교황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엘렌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계속 교황을 보고만 있었다.
“정식적으로 검증 시간을 가져봐야 하지만… 황실에서 금기를 범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금기를 황태자가 저질렀다는 물증이나 증거는 있습니까?”
의외로 차분한 음색이었다. 베로니카 황녀가 저에게 단순한 변비약과 지사제가 섞인 독을 쓴 것을 알고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제가 증인이 되지 않나요?”
내 말에 교황은 고개를 저었다.
“황실의 금기는 직계 혈손이라면 누구든지 범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맞는 얘기지만….
“금기를 범한 사람이 저를 데리고 왔을 리는 없잖아요.”
전체적인 상황으로는 어폐가 안 맞는 말이었다. 교황도 그걸 깨달았는지 할 말이 없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관여하기 싫구나.’
황실의 권력 다툼에 신전이 개입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었다. 베로니카 황녀가 말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빼고 싶은 생각인가 본데, 힘들 거예요.”
그녀가 어느새 교황의 지척에 다가가 조용히 을렀다.
“우리가 먼저 오지 않았다면, 황태자가 인편을 보냈을 테니까.”
“인편?”
교황이 물었지만 베로니카 황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올 일은 없었다. 그 순간, 문밖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추었고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강한 힘을 받았는지 문짝이 너덜거렸다. 성기사였다.
“성하!”
치료실에 급습한 성기사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 뒤에, 마리어스 기사와 리카르도가 보였다.
‘리카르도?’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교황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성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성하, 사정은 조금 이따가 설명할 테니 성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성기사의 말에 교황이 우리 쪽을 흘긋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지.’
베로니카 황녀의 설득이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도는…….
‘황태자를 죽이는 것.’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런데 저 일행 중에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는 어디 있는 거지?
리카르도가 앞으로 나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 황궁까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안셀모의 명인가요?”
“그렇습니다.”
리카르도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베로니카 황녀는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으며 태연히 물었다.
“이곳에 안셀모도 왔을 텐데, 어디 있는 거죠?”
“마차 안에 계십니다.”
“각하!”
마리어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바이올렛이 리카르도를 불렀다. 왜 그러한 정보까지 알려주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혼자 있나요?”
내가 물었다.
“…….”
리카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 혼자 있다는 건.
‘설마.’
신전은 린넨 숲의 근처에 있어서 자연 풍경이 잘 보이는 위치였다. 그렇다는 말은 뱀을 숨기기에도 최적의 장소라는 뜻도 되었다.
그러나 그 넓은 숲 안에 뱀을 숨긴다고 한들, 황태자가 다시 그 뱀을 찾아 금기를 범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내 불안한 시선을 알아차린 베로니카 황녀도 얼굴을 굳혔다.
“안셀모는 어렸을 때 마법으로 꽤 촉망받던 수재였어요. 그러나 태자 책봉을 받고 국사를 맡느라 마법을 자연스럽게 그만두었죠. 그러나 자신이 숲에 숨긴 뱀 하나를 찾을 능력은 있어요.”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불공평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뱀 하나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건지. 물론 영혼도 필요하지만, 황태자가 다른 사람의 영혼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교황은 깊이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성기사를 향해 말했다.
“로이스 경. 태자 전하를 불러 주십시오. 직접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반문 없이 성기사들은 교황의 명에 따라 치료실을 나갔다.
리카르도가 말했다.
“그대들도 태자 전하 곁에 돌아가도록. 황녀 전하는 내가 잘 인도하도록 하지.”
마리어스 기사들과 바이올렛은 그의 명령에 주춤했다. 리카르도가 어서 안 나가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마리어스 기사들은 황태자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여겼는지 이내 치료실을 나갔다.
삽시간에 사람이 많았던 치료실이 텅 비었다.
리카르도가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은가?”
“……괜찮아요.”
어색한 대답이 나왔다. 베로니카 황녀를 도와준 게 리카르도라고 했었지. 황태자를 따라 여기까지 온 걸 보아선 그건 들키지 않은 듯했다.
“공작 각하는 괜찮으세요?”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것 같군.”
내 걱정에 그의 심기가 오히려 불편해진 듯했다. 그를 보니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문 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엘렌에게 닿았다. 푸른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쳤다. 아. 저거 분명 정체를 알아차린 눈빛인데.
“낯이 많이 익군. 백작저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
“그, 그럴 리가요.”
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일로도 곤란한데, 과거 일까지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다.
“아 참, 전하.”
나는 베로니카 황녀를 보았다.
“증언서는 우리가 제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게…… 저분은 아예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나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그는 복통으로 힘든지 앉은 채 이쪽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몸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고…….”
계속 치료실을 안 나가고 있는 저의가 무언지 궁금했다. 이쪽이 굴러가는 상황이 신경 쓰이기나 하는 걸까.
“안 죽어요.”
베로니카 황녀가 일갈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는다니까.”
“…누군가에 대해 안 좋은 선입견이 생길 것 같습니다.”
교황이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굳이 누구라 이르지 않아도 뻔했다.
잠시 뒤, 성기사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황태자는 없었다.
“황태자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성하.”
“아니…….”
나는 당황했다. 이 시점에서 황태자가 사라진다는 게 이상했다. 베로니카 황녀는 무언가 짐작이 된다는 듯 교황을 향해 물었다.
“여기에 신을 모시는 제단이 어디 있죠?”
“신전 너머 산을 조금 오르면, 제단이 있습니다.”
제단?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베로니카 황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제단이 신전 안에 없고, 외부에 있는 건가요?”
“처음 신전이 지어진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최초 신전은 제단이 있던 곳에 있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 이곳에 새로 신전을 지었죠…….”
조금 안색이 나아진 교황은 줄줄 말하다가 말을 흐렸다. 그의 얼굴도 점점 굳어졌다.
“로이스 경.”
“예, 성하.”
“황태자가 지금 제단 쪽으로 향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예.”
상황을 지켜보던 리카르도도 성기사를 따라나섰다.
“시간을 돌리는 마법에 있는 제약이 뱀 하나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도 필요한가 보네요.”
베로니카 황녀가 미간을 구긴 채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 나는 그제야 황태자가 왜 이곳에 왔는지 깨달았다.
황태자가 신전에 도달했다는 것에 생각이 쏠려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에 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왜 황태자가 베로니카 황녀를 잡으러 이곳 신전까지 직접 온단 말인가.
기사들을 보내면 될 터인데, 직접 오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설마!”
손에 핏기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황급히 베로니카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얼른 막아야 해요.”
그는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돌리기 위해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