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베로니카 황녀는 그간 나와 엘렌의 대화에서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 대답을 유보하자, 그걸로 답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황녀가 말했다.
“좋은 능력이군요. 말로 꺼내지 않아도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유용하고 실용적이네요.”
확실히 엘렌은 그 능력을 이용해 요긴하게 상대의 마음을 읽었다.
‘물론 거의 9할이 내 마음을 읽는 데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괜히 그것만 생각하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나는 황녀의 말을 곱씹었다. 세상 살기 편한 능력인가. 그게?
물론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사업을 할 때는 편하겠지만, 사람이 사시사철 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물며 감정이 없는 로봇도 아니었다. 남의 생각이 어떠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 엘렌이라면 모를까. 나는 별로 썩 좋은 능력이란 생각이 안 들었다. 우연히 상대의 마음을 읽었다가 외려 내 마음이 다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엘렌 알렉산드로는 안셀모의 마음도 읽을 수 있나요?”
“……제가 드릴 수 없는 답 같습니다. 전하.”
내가 대답을 회피했다. 엘렌의 능력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 * *
“성하.”
“성하.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중앙 예배실로 가는 길에 교황을 발견한 사제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 먹은 음식에 탈이 난 것 같으니 약을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아, 네. 어머. 꼬마 형제님. 몸은 괜찮아요?”
아까 같이 치료실에 있던 사제 중 하나가 엘렌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네에!”
그녀의 물음에 엘렌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아까 죽을 것처럼 피를 토하던 아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아까 일을 떠올린 사제는 눈시울을 붉히며 마주 웃었다.
“성력으로 치료를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얼른 푹 쉬세요. 성하.”
꼼짝없이 저가 치유를 했다고 믿는 사제를 보며 교황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은 교황이 성력을 많이 쓰면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걸 알고 있어 그의 상태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쪽은 성전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아닙니다.”
엘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교황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교황이 당황한 낯으로 속삭였다. 엘렌이 가려던 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증언서나 성명서를 작성하는 쪽은 이 길이 아닐 텐데.”
“이 길이 맞습니다.”
교황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지금은 중앙 예배당이 있는 성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신의 가호로 마법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하여 뒤에 따라오는 마법사의 힘은 무용지물이 될 터.
눈앞에 있는 이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건 알지만, 마법사가 신전의 내부 약도까지 훤히 꿰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 굳게 믿고 있는 교황을 엘렌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흐음, 그래?”
엘렌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만약 아니면?”
“…….”
“허튼수작을 부릴 작정이었다면 대가는 목숨으로 받아가도 되나?”
교황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엘렌의 눈동자에 스치는 살기를 엿본 교황은 관절 인형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성전에서 마법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으며, 그곳엔 많은 성기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교황은 그리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은 거북이마냥 느려지기만 했다. 자꾸만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아까 어른 모습이었던, 옆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조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침마다 예배실에 놓여 있던 신문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당신, 설마…….”
“맞아. 엘렌 알렉산드로.”
교황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오뚝이 인형처럼 꼿꼿하게 섰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시선의 끝엔 천진무구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자가 바로 마탑의 주인이자 대마법사.
엘렌 알렉산드로는 신문에 종종 얼굴을 비추기도 했는데, 딱히 좋은 소식으로 신문을 장식한 건 아니었다. 그간 신문에서 그에 관해 읽었던 내용을 떠올린 교황의 낯이 삽시간에 핼쑥해졌다.
혹여 마법으로 이 신전을 아예 무너뜨려 버린다면 어떡하지.
심지어 대마법사라는 존재가 성전의 가호에 제약이 걸릴지 의문이었다. 대마법사들은 이따금 세상의 순리에서 벗어나는 힘을 행하기도 했던 기록이 있었다. 그 일련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엘렌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허튼짓만 안 한다면 모두가 안전할 테니까.”
교황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천천히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엘렌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였다면, 해독제를 만지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을 것이었다. 연둣빛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띠었다.
* * *
“증언서입니다.”
증언서를 내민 교황의 손은 식은땀이 흥건해져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증언서를 받았다. 그는 이제 내 존재에 대해선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얼른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아, 해독제.”
베로니카 황녀는 까먹은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낸 듯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흐음.’ 하고 비음을 흘렸다. 그녀의 얼굴에 미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요. 그럼 깨끗하게 나을 테니까.”
“무슨 소리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교황에게 내가 슬쩍 설명을 첨가했다.
“지사제랑 변비약을 섞은 독이라고…….”
“죽을 만큼 괴로운데, 절대 죽지는 않는 독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죽는 독이 아니다. 그걸 알고 기뻐할 줄 알았건만, 교황의 안색은 더욱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 복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얼마나 아프길래 저런 얘기까지 나오는 건지 조금 궁금했지만, 나는 내 손에 있는 증언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베로니카 황녀가 말한 대로 증언서는 정갈한 글씨체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하. 이제 증언서를 얻었는데 저희는 그만…….”
베로니카 황녀에게 말하던 나는 우연히 창밖을 보고 말을 흐렸다. 금색 마차가 신전의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 창가에 바짝 다가섰다. 불길한 예측대로 금색 마차에는 황가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마차 주변을 도열하고 있었다. 마리어스 기사들이었다. 나는 곧바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손님이 올 예정이었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에 엘렌을 바라보았다. 엘렌은 훌쩍 침대를 넘어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태자가 예상보다 빠르게 왔는데.”
엘렌의 말에 베로니카 황녀의 시선이 교황에게 닿았다. 한겨울에 몰아치는 눈 폭풍보다 더 매섭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교황이 설마 황궁에 우리의 존재를 밀고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의심에 반박했다.
“전하, 성하께서 연락을 넣었다고 하기엔 너무 빨라요.”
“……그렇긴 하네요.”
베로니카 황녀가 찝찝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표정에 그대로 떠올랐다.
-똑똑. 교황 성하. 계십니까?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엘렌은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나는 문을 물끄러미 보면서 깊이 고민했다.
“전하, 지금 이 문 앞에 황태자가 있으면 어떡하죠?”
“문을 열면 바로 날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하겠죠.”
“그렇다면 엘렌의 마법으로…….”
빨리 이동해서 피신을……!
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베로니카 황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어요.”
베로니카 황녀가 교황을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로위나 카시어스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이단이나 악마 따위는 절대 아니죠.”
그녀가 교황의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그녀는 황태자의 금기 마법에 영혼이 소멸되고, 다른 세계에서 멀쩡히 지내고 있던 영혼이 이 몸에 들어온 무고한 사람이에요.”
“그걸 저에게 설명하는 진위가 뭡니까?”
의심스러우면서도 새삼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까 전부터 우리는 교황을 우리의 뜻에 따라 휘두르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베로니카 황녀가 상황을 설명하는 건 교황의 반감만 키울 뿐이었다.
“어차피 믿지 않겠지만, 그게 사실이거든요. 물론 이 신전에서 배우는 신학에서는 다른 세계의 존재는 부정하고 여럿을 죽였지만.”
그녀의 말에 교황은 몸을 움찔했다. 정곡이 찔린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베로니카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인지하면서도 교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증언서를 가지고, 교황에게 내밀었다.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이걸 황실에 정식으로 제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