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다짜고짜 정체가 뭐냐는 물음에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교황을 마주 보자 그는 흠칫하며 사과를 건넸다.
“실례했군요. 영혼의 그릇이 처음 보는 형태라서 저도 모르게….”
“영혼의 그릇?”
“…….”
교황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빤히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병상 위에 누워 있던 엘렌이 몸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선 설명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가 교황 앞에 섰다.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엘렌이 천천히 시선을 맞추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안 그래? 교황 성하.”
“마법으로 모습을 변환시켰군요.”
놀랍지만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영혼의 생김새를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엘렌의 영혼을 보고 파악한 모양이다. 교황을 보는 엘렌의 미소가 삐뚜름히 변했다.
‘아무래도 교황의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인데.’
엘렌의 통찰이 통하지 않는 건 오직 황실의 직계뿐이었으니 아마 교황의 생각은 읽을 수 있을 터였다. 아까 전에 엘렌이 가정한 대로 교황이 나를 이단으로 몰기라도 한다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황태자가 내가 쓴 책을 교황에게 건네기도 전에 상황은 끝나버리겠지.
“사람마다 영혼의 색은 다르지만, 그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의 모양은 일정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영혼의 색도 독특하나 그보다 더 특이한 건 그릇의 형태군요.”
차분한 음색이었지만 나를 보는 시선에는 경계심이 짙었다.
그리고 나를 자매라 칭하지 않고, 여인이라고 말한다는 건.
사소한 칭호 변화였지만, 손발에 핏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슬쩍 황녀를 보았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교황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로위나. 보증인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에요.”
“네?”
나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황녀를 바라보는 엘렌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을 모시는 성전에서 신의 대리자도 아닌 내가 보증인이 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죠.”
교황 앞에 바로 서 있던 황녀는 목걸이 안에서 작은 침 같은 것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들이대었다.
“황녀,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교황이 식겁하며 소리쳤다. 황녀의 돌발 행동에 나 또한 아연한 기분이었다.
‘맙소사.’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람.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베로니카 황녀는 교황의 목에 침을 갖다 대며 위협하고 있었고, 교황은 계속 성기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치료실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 치료실이 방음이 아주 잘 되는 방이거나 혹은 엘렌이 방음 마법을 하고 있을 터. 물론 나는 후자일 거라 확신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성하.”
“황녀, 돌아올 수 없는 강은 건너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쓰러진 소식은 알고 있나요?”
황녀는 교황의 설득은 사뿐히 무시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교황은 자신의 발언이 그리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측에서 신전에 독극물의 해독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 말에 잠시 황녀는 입을 다물었다. 교황의 대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황태자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황태자는 교황이 자신이랑 접촉했다는 사실을 극구 숨기려고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황태자와 교황이 손을 잡았다면, 교황은 황제가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인 양 대답했을 터인데.
그게 또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이 엘렌에게 향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황태자와 접촉한 건 아니야.’
좋은 소식이었다. 엘렌이 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황녀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교황을 보았다.
“그러면, 폐하를 쓰러뜨린 독이 내 방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요?”
“그건… 모릅니다.”
교황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황녀에게 교황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할지 갈등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되면 엘렌의 통찰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난 상관없어, 로엔.”
내 생각을 읽은 엘렌이 답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렌의 통찰 능력이 세상 밖에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다.
특히나 남의 관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엘렌이라면 더.
황녀는 우리의 대화를 의아한 시선으로 보다가 다시 교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목에 대고 있는 침에 무슨 독이 발라져 있을 것 같나요?”
“서, 설마.”
교황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황녀는 미소만 지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그러자 교황은 혼자 추측을 끝냈는지 몸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렌이 어어, 하고 말했다.
“그 상태에선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엘렌이 목에 손을 긋는 시늉을 했다. 교황의 안색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황녀님, 이렇게 겁을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나요?”
나는 다급하게 황녀의 곁에 다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황녀는 교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로위나, 이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네?”
뭘 알고 있다는 거죠.
‘전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면 당황스럽습니다. 전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이들을 자매님, 형제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죠. 하지만 유일하게 부르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이교도나 악마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요. 특히 눈앞에 있는 성자이자 교황인 요제프라면요.”
“특히 성하께서 그렇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요제프는 호칭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어릴 때 종종 이야기를 나눈 사이라 잘 알고 있죠.”
황녀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교황은 독침이 목에 닿을세라 까치발을 든 채 위태로운 자세로 얼굴을 붉혔다.
“잘 알고 있는 사이에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까. 황녀!”
“난 내 앞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가만두는 편은 아닌데… 슬슬 나도 화가 나려고 하네요.”
교황을 담은 청색안이 점점 서늘하고 차갑게 식어 내리고 있었다. 교황은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힘에 부치는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렇게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 모습을 싸늘한 눈빛으로 보고 있던 황녀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 향했다. 저 시선이 왜인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어떡할까요. 로위나.”
황녀의 청록색 눈동자 안엔 그녀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교황의 처후까지 나보고 결정하라는 것인가.
여기 오기 전에는 이런 얘기까진 없었잖아!
내가 갈등하는 사이, 황녀가 다시 교황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로위나가 결정을 꺼리는 듯하니 내가 대신할게요.”
“뭘 대신한다는…… 헉!”
황녀는 교황의 목에 침을 놓았다. 그 광경을 곁에서 바로 목격한 나는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전하!”
진짜 독침을 찔러넣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교황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곧바로 교황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한편, 베로니카 황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폐하처럼 바로 반응이 오지는 않을 테니까.”
“저, 전하……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셔도 이러시면…!”
머리가 텅 비는 느낌에 베로니카 황녀에게 항의하려고 해도 워낙 당혹스러워 조리 있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녀가 하는 말이 이상했다.
황제의 음독 사건은 황녀의 짓이 아니었을 텐데, 자꾸 황녀는 음독 사건의 범인이 저인 양 말하고 있었다. 설마…….
엘렌을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황녀의 생각을 읽을 수 없으니 나처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상황을 관망하는 그의 시선엔 무언가를 알고 있는지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혼자 알지 말고 나 좀 알려주지…….’
그러나 지금은 교황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황녀의 독침에 찔린 이후로 교황은 계속 배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복통을 호소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해독제는 나한테 있어요.”
“그러면 어서!”
“맨입으로?”
“황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교황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날이 빠짝 선 분위기 속에 황녀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협상이라는 건 일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끼리만 가능하거든요. 근데 우리 둘 중 어느 쪽도 그거에 해당은 안 되니까.”
그녀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때는 선수를 치는 쪽이 유리한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