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무슨 일이에요, 리아.”
눈앞에 있는 여자 사제의 이름이 리아였던 모양이다.
모여드는 시선에 로위나는 점점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내가 이런 역할인 거람.’
차라리 자신이 아픈 척 몸져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로위나는 계속 아픈 가족을 두어 절박한 사람인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사제님! 흐으윽, 제발 제 동생이랑 아들 좀 살려주세요!”
“자매님, 먼저 치료실로…….”
“언니…… 미안해. 알렉스가 크는 모습은 같이 봐야 하는데…….”
열이 올라 헐떡이는 연기가 가히 이 사람이 황궁에서만 지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로위나는 잠시 그런 황녀를 의심스럽다는 듯 보다가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벨, 조금만 견뎌. 사제님이 치료해주실 거야……. 여기엔 교, 교황 성하도 계시잖아.”
그 모습을 보던 사제들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앞서 상황을 파악한 사제들에게 이야기를 전달받은 대사제가 다가왔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 사제였다.
“자매님, 어디서 오셨나요?”
그 말을 듣자마자 로위나는 베로니카 황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열심히 우는 소리를 냈다. 눈물이 너무 안 나오는 탓에 차라리 얼굴을 가리는 쪽을 택했다.
“흐어억, 어떡해요. 우리 벨, 우리 벨….”
대사제는 다가와 베로니카 황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엘렌은 아까와 같이 황녀의 체온을 순간적으로 높였다. 베로니카 황녀는 슬쩍 엘렌을 보았다.
‘더워 죽겠네.’
“열이 높군요.”
열이 펄펄 끓는다고 생각한 대사제는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머지 사제들에게 뭐라 뭐라 했다.
‘해열제,’ ‘집중 치료.’ 등등 이야기가 오가는 걸 봐선 순조롭게 그들의 연기가 통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벨!”
로위나는 품에 안은 황녀를 보며 소리 질렀다. 베로니카 황녀는 대본대로 정신을 잃은 척했다.
대사제는 깜짝 놀라 황녀에게 다가가 성력을 들이부었다. 그러나 열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사제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갔다.
‘애초에 열이란 것도 가짜였으니 내려갈 리가.’
엘렌이 계속 마법으로 열을 높이고 있는 상황에 성력이 들어간다고 열이 내려갈 리 없었다. 대사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성력으로 열이 내려가지 않은 환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사제의 표정을 본 사제들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단 치료실로 옮깁시다.”
대사제의 말에 사제들이 황녀를 치료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위나는 대사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했다.
“우리 알렉이랑 베, 벨은 괜찮아지는 거죠? 사제님?”
“그럼요, 자매님. 금방 나아질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드럽게 대답하는 대사제의 눈에는 걱정과 혼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위나는 쿡쿡 쑤시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했다.
* * *
그렇게 치료실에 들어가 사제들이 각자 약을 가지러 나간 사이, 나는 황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엘렌의 마법으로 교황을 데리고 오는 편이 빠르지 않아요?”
우는 연기를 하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황녀는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는 척 말했다.
“교황이 있는 성전은 강력한 성력으로 마법이 철저하게 차단되어있어요. 그를 그곳에서 꺼내려면 제 발로 나오게 할 수밖에 없죠.”
“아…….”
“한번 실험해볼까?”
엘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그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저렇게 말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길 것 같아서 겁이 덜컥 났다.
분명 이런 녀석이 있을까 봐 성전에서 마법을 차단하는 장치를 만들어둔 것이 틀림없다.
잠시 뒤에 사제들이 저마다 절구를 들고 치료실에 들어왔다. 절구 안에 약초들이 있었는데, 여러 약재가 섞여 독한 내와 쓴 내가 엄청 났다.
설마, 저걸 베로니카 황녀랑 엘렌이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자매님,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듯이 먹기 조금 괴롭다 하더라도 드셔야 한답니다.”
이런. 내 생각이 맞은 모양이다.
“그, 그게.”
나도 모르게 약을 먹이려는 사제의 팔을 붙잡았다. 엘렌은 몰라도 베로니카 황녀에게 이 쓴 약을 먹여도 괜찮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독이라도 든 건 아니겠지?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내 입은 생각과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맙소사.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안심하세요. 저희 신전엔 뛰어난 약제술을 가진 분이 더러 있답니다.”
엘렌과 베로니카 황녀는 꼼짝없이 쓴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엘렌은 특히나 쓴 걸 못 먹는 아이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저거 먹다가 뛰쳐나가는 건 아니겠지?
엘렌의 성격상 뛰쳐나가기보단 저 약을 가져온 사제들을 응징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이 약을 마시는 걸 지켜보는데, 그 순간 엘렌이 콜록,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뻔했다.
“엘… 아니, 알렉스!”
나는 급하게 그를 안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는 계속 기침을 하며 피를 뱉어냈다.
“쿨럭.”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제들이 서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 자매님. 아드님께 약재에 대한 알러지가 있나요?”
“이러다 죽는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진심으로 엘렌의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계속 피를 토하는 그를 보면서 내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이, 이건 대본에 없던 일인데.
“제발….”
엘렌이 콜록거리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아요…….”
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눈을 감았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그런 말을 하니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연기인지, 실제 상황인지 긴가민가했던 나는 급하게 사제를 붙잡고 말했다.
“서, 성하를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
“하지만…….”
사제들이 곤란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까 피를 보면서 크게 놀라 나도 모르게 나온 눈물이었다.
“제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대로 놔두면 분명….”
내가 엘렌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죽을 거예요…….”
그런데 슬쩍 보니 엘렌이 눈을 찡긋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제길. 저게 연기였어.
나는 욱, 하고 화가 치미는 걸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심각한 얼굴로 사제들은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한 사제가 치료실을 급하게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애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고…….”
특이한 점은 남자는 이 사제들과 다른 복식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단조로운 백색의 차림을 하고 있는 사제들과 다르게 하얀 옷에 금실로 수가 놓여 있는 옷이었다.
‘혹시 저 사람이 교황인가.’
교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젊은 감이 있었다.
내 안에서 반백의 노인을 상상했지만 이건 너무…….
그 순간, 베로니카 황녀가 내 옷을 잡아당겨서 얼굴을 갖다 대라는 듯 손짓했다. 내가 어정쩡하게 그녀의 얼굴에 귀를 갖다 대자 그녀가 속삭였다.
“교황이에요.”
“저, 저 사람이요?”
의외였다. 저렇게 젊은 사람이 교황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예전에 읽었던 신문을 떠올렸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신문에 선대 교황이 죽으면서 젊은 대사제가 교황직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한번 실린 적이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교황을 보았다.
잿빛 머리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엘렌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엘렌을 보며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던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은 더욱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빛엔 일말의 공포마저 느껴졌다.
“이분들 빼고, 다들 나가주십시오.”
“성하?”
대사제가 의아한 얼굴로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교황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나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제들은 약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다. 나가는 내내 사제들은 우리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는지 미련이 진하게 남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사제들은 이런 스토리에 약하거든.’
어릴 적, 신전을 오가며 꼬박꼬박 기도를 올린, 자칭 독실한 신자인 베로니카 황녀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정확했다.
공작저에 들어가기 위해 엘렌을 이용해 동정심을 유도하다가 실패했던 내 상황이랑은 정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에 있던 좁쌀만 한 양심이 더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완전히 사제들이 나가고, 교황과 우리만 남아 있자 엘렌과 베로니카 황녀는 언제 아팠냐는 듯 지루하다는 얼굴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그들의 영악한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로니카 황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은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그리고 이분은….”
하던 말을 멈춘 교황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를 담는 푸른색 눈동자가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