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황태자가 건넨 책을 본 리카르도는 처음으로 표정이 흐트러졌다. 흔들리는 동공을 본 황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리카르도는 당장이라도 이 손에 있는 책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무의미한 짓이란 걸 알았다.
이 책은 인쇄술로 복사가 된 복사본이었다.
그렇다면 원본이 따로 있거나, 이와 같은 또 다른 복사본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세운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기실 이대로 황태자를 따라가 황궁에 들어가자마자 황궁 내부에서 그를 체포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를 체포할 구실이나 증거는 없지만, 일단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상태에서 로위나를 증인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이대론 오필리아가 죽는다.’
리카르도는 전면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심연보다 더 깊고 어두운 빛을 띠었다. 은은한 살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여기서 황태자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
리카르도는 엘렌 알렉산드로가 혼수상태였던 일을 떠올렸다.
보고에 의하면 그가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높은 가능성으론 그렇게 만든 사람이 황태자일 것이다. 대마법사인 그를 무슨 수로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걸 모르고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친 리카르도는 책을 펼쳤다.
물과 얼음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설인을 봉인했던 고대 마도구.
충분히 대마법사를 대적할 수 있을 물건이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아마 이 책의 원본은 바로 신전으로 도달할 거야. 죽더라도 정의는 실천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황태자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를 보는 리카르도의 눈동자에 진한 살기가 묻어났다. 지금 황태자는 로위나의 목숨을 걸고 협박하고 있었다.
“전하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제 선에서 막겠습니다.”
“든든하군.”
리카르도는 마차 앞으로 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어스 기사들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흉악한 표정을 짓는 공작은 처음 보았다. 애초에 눈살 하나 찌푸리는 걸 보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누구 하나 눈앞에 띠면 족칠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구에겐 살얼음 위를 걷는 여정이 황궁까지 쭉 이어졌다.
황궁에 도착하자 궁 안에선 분주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황녀는 발견했나?”
리카르도는 황궁에 돌아다니는 기사 중 하나를 불러세우고 물었다. 붙잡힌 기사는 긴장으로 딱딱히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태자는 리카르도에게 대답하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목격자인 마구간 지기를 데려오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명령에 이벨 하브라고 불리는 마구간 지기가 붙잡혀 왔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평범한 제국민의 청년처럼 보였다.
리카르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태는 영락없이 평범한 궁인처럼 보이지만, 이벨 하브. 그는 북부 출신의 사병으로 리카르도가 제도 길에 오르자마자 황궁에 심은 심복이자 세작이었다.
북부에 저가 없는 사이, 황태자가 북부에 주둔시킨 군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이곳에 둔 것이었다.
“어떻게 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말해보십시오.”
황태자가 이벨 하브에게 물었다. 이벨은 높으신 분이 저를 개인적으로 찾는다는 것에 놀란 순수한 청년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워, 원래부터 말을 좋아해서 여관에서 손님의 말을 관리하는 마구간 지기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황궁에서 일하는 분과 인연이 닿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디아트 휴고라는 분입니다.”
“휴고 남작이군요.”
황궁의 재무부에서 일하는 귀족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에 의심이 조금 옅어졌다.
“신원은 확실하지만…….”
황태자는 그대로 옆에 있는 기사의 칼을 뽑고 이벨 하브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즉시 리카르도는 칼집으로 황태자의 검을 막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리카르도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상황을 뒤늦게 인지했다.
리카르도에 의해 검이 막힌 황태자는 불쾌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전하.”
분위기가 차갑게 팽배해졌다. 이벨 하브는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 살려주세요.”
끝까지 주군을 위해 연기하는 이벨을 보는 리카르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고한 사람을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리카르도는 이벨 하브를 보며 황태자에게 말했다. 황태자가 답했다.
“후환은 없애야 하지 않겠나. 아직 황녀를 발견한 사람이 없는데 한낱 마구간 지기가 발견을 했다는 것이 수상하지 않나?”
“그러면 감옥에 가두어 문초를 하겠습니다. 이 자를 감옥에 가두어라.”
“예.”
리카르도의 명령에 황궁 기사들이 이벨을 감옥으로 데려갔다.
“황궁의 기사들이 공의 명령을 참 잘 따르는군.”
황태자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차피 이벨 하브를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고, 이 일에 확실히 에르도안 공작이 연루되었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반응을 보아선 저 이벨 하브는 공작이 심은 사람이었다.
황태자는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대공은 지금 집무실에 있나?”
“그렇습니다.”
‘대공?’
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인물에 리카르도는 얼굴을 굳혔다. 황태자를 따라 집무실에 가자 알렉산드로 대공이 있었다. 대공은 황태자와 에르도안 공작이 함께 들어올 줄 몰랐다는 듯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아아. 상관없으니 그냥 말하게.”
그제야 대공의 시선이 공작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신전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우리도 늦을 수는 없지. 어서 신전으로 향할 채비를 해야겠어.”
“전 여기에 남겠습니다.”
대공이 말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도는 황제와 황태자의 든든한 우군이 카시어스 공작이 아닌, 알렉산드로 대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이 놀란 눈치군. 대공한테 할 말이 많은 눈치인데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해 주지.”
황태자는 리카르도를 보며 즐겁다는 듯 웃고 집무실을 나갔다. 대공과 단둘이 남게 된 리카르도가 먼저 말했다.
“엘렌 알렉산드로가 태자 전하에 의해 죽을 뻔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엘렌의 위치를 보고한 것이 나라네. 공.”
“그는 대공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 태양을 등진 사람은 영원히 빛을 볼 권리가 없지. 그런 사람은 더 이상 내 가문의 사람이 아니네.”
대공과 같은 저러한 눈빛을 한 사람들을 리카르도는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척박한 영지에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에 홀리던 사람에게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대공은 황제와 황태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광신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부디 공도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네.”
다들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일컬었던 대공의 눈빛이 사실은 광기였음을, 리카르도는 깨달았다.
* * *
모든 구조물이 백색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신전 앞에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 모두 다 해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머리는 완전히 떡이 져 한 달은 씻지 못한 행색처럼 보였다.
신전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곧바로 창을 치워서 문을 열었다.
‘효과가 좋네.’
로위나는 어린아이로 변신한 엘렌을 안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시작해?”
엘렌이 속삭였다. 로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나 너무 추워.”
“조금만 기다려, 사제님이 도와주실 거란다.”
로위나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한 여자 사제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사, 사제님.”
“자매님, 무슨 일인가요?”
“제 동생이랑 아들이 열이 나서…. 벨!”
그 순간, 베로니카 황녀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언니…….”
로위나가 엘렌을 안은 채 황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어떡해. 지, 지금 벨이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이러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죠. 사제님.
로위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에 사제가 베로니카 황녀에게 다가갔다.
“열이 얼마나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 순간, 엘렌과 베로니카 황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렌은 보이지 않게 손을 까닥였고, 황녀의 이마가 잠시 확, 뜨거워졌다.
마법을 썼다는 것을 모르는 사제는 화들짝 놀랐다.
“앗! 뜨거!”
사제는 순간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허둥지둥 해명했다.
“벼, 별거 아니니.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자매님. 금방 열은 내릴 거랍니다.”
여기서 제일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사제님인데요.
선량한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이 쿡쿡 쑤셨지만, 로위나는 눈물을 억누르는 척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몇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라요…. 벨이 없으면, 벨이 없으면. 흐윽.”
로위나는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이모, 죽는 거야?”
엘렌이 순진한 얼굴로 거들었다.
슬슬 다른 사제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