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황태자가 아일라를 구하고 싶다면, 쓰라고 했던 그 책.
그 책은 절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을 수 없는,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 적혀 있었다.
만약 황태자가 그 책을 신전에 보고한다면, 나를 망상증 환자쯤으로 보겠지만 내 안에 있는 영혼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아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엘렌도 내 속을 읽은 모양인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고요한 시선으로 분위기를 읽고 있던 베로니카 황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증거가 있군요.”
이렇게 된 이상 숨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나는 황녀에게 책에 관한 존재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황녀를 재촉했다.
“황녀 전하, 저희 부모님께 계속 전하의 존재를 숨길 수는 없어요. 그리고 지금이 밝힐 때인 듯해요.”
“공작 부부는 모든 걸 알고 있나요?”
황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진짜 ‘로위나 카시어스’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부부는 당신을 도와줄까요?”
무표정한 얼굴로 황녀가 물었다. 사실관계를 미리 파악하기 위한 악의 없는 물음일 게 분명하지만, 듣는 내 입장에선 유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씁쓸히 답했다.
“말씀은 한번 꺼내 보려고요. 혹시 모르잖아요. 가문이 얽힐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도와주실지.”
황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도와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면, 우리끼리 해결을 보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요.”
“나쁘지 않았어요, 당연히 짚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괘념치 마세요.”
이어 엘렌이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잠깐 마탑에 다녀올게.”
“왜?”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묻는….”
그대로 사라진 그를 보며, 이제 어이없는 기분도 안 들었다.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금기를 막을 방법을 찾으러 가는 걸 거예요. 여기 오기 전에 저한테 금기를 막을 방법을 다시 한번 물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거 하나 답해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지? 하지만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신전을 마법 없이 직접 가기엔 위험해.’
마차를 타고 가면 금방 황태자에게 꼬리를 잡히고, 모든 일이 무산될 것이다.
내가 방에서 나오자, 복도를 걷고 있던 하인이 깜짝 놀랐다. 보지 못한 낯선 여자가 내 방에서 나와 같이 나란히 걸어 나오는 것에 놀랐는지 베로니카 황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지, 지금 마님과 각하께선 침실에 계십니다.”
하인은 옆에 있는 여자에 대해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눈치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인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두 분 다 침실에?’
해가 뜬 오후엔 평소 서재에 있던 아버지와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자수를 놓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침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시려나.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실까.
아마도 나에 대한 대화겠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문자답에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무거워졌다.
그러나 옆에 황녀가 있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발걸음을 떼었다.
베로니카 황녀와 함께 부모님의 침실에 도착한 나는 주춤 입을 열었다.
조금 말을 꺼내기가 걸리는 이야기라 말을 꺼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전하, 실례지만 먼저 제가 대화하고 조금 이따가 들어오실 수 있을까요?”
“그래. 대신 나에 관해 좋은 이야기 좀 많이 해줘요.”
감히 상전을 밖에 세워두는 건 무례한 짓이지만, 황녀는 개의치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녀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 답하고 노크했다.
방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침실에 있다고 했는데.’
그새 다른 곳에 계시는 걸까.
다시 한번,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노크하자 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번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침실에 들어가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내가 오늘 하루는 노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 로위나.”
어머니가 피곤하고 짜증이 난 얼굴로 말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예기치 않은 방문자에 놀란 표정을 짓던 어머니는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로위나, 무슨 일이니?”
누가 들어도 어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말투에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힌 듯 묵직해졌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계속 곰방대를 들고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가 담뱃불을 끄고 말했다.
“무슨 일이더냐.”
“저는 신전으로 가려고 해요.”
“신전?”
나는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설명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베로니카 황녀를 이대로 문밖에 계속 세워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버지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안 된다. 너무 위험한 짓이야.”
“교황이 절 이교도나 악마로 몰아 화형대에 올릴까 봐요?”
“그걸 아는 녀석이 거길 가겠다는 말이냐!”
화기로 붉어진 얼굴을 한 아버지가 노성을 질렀다.
“이 일에서 아예 빠지거라! 내가 해결하겠다.”
“폐하께선 표면상으로 침대 신세고, 황태자는 벌써 황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무슨 수로 해결하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순간에 노크 없이 방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베로니카 황녀를 발견한 아버지는 눈을 홉떴다.
“사이 좋은 부녀지간이라 부럽네요. 아, 순수하게 칭찬한 거니, 꼬아 듣지 않았으면 해요. 저희 가족은 그런 걱정을 해주는 사이는 아니었는지라.”
“저, 전하.”
당황한 듯 그녀를 불렀지만, 속으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꽤 좋은 타이밍이었다.
황녀가 등장함으로써 한번 점화가 되면 끝도 없이 타오르는 아버지의 분노가 찬물이 끼얹어진 듯 식었다.
“오랜만이네요. 카시어스 공작.”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혼란과 놀라움이 섞인 얼굴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었다. 황녀는 느긋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로위나의 보증인이 될 테니. 한 가지는 약속하죠. 괜히 마녀사냥으로 죽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믿고 저희가 전하께 로위나를 맡긴단 말입니까.”
아버지의 다홍색 눈동자는 작지만 끊임없이 불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언성이 높아지는 대화는 아니었건만, 분위기는 일촉즉발이었다.
“로드리고,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로위나는 황태자의 암살에 시달려서 살아 있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 거예요.”
“그래서 얘를 사지로 몰겠다는 말이오?”
“퇴로가 없지 않아요? 그리고 로위나가 잘못된다면, 엘렌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엘렌은 갑자기 왜….”
느닷없이 언급되는 엘렌에 당황하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신전을 마차로 갈 건 아니잖니. 로위나.”
“그게 무슨 말이오. 부인.”
“설마 마차를 타고 신전을 간다면 반대할 거지만, 마법으로 이동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아버지에게 설명하던 어머니가 나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런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엘렌이 유일하니까요.”
내가 말없이 황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대공자의 도움으로 신전에 갈 거예요. 그리고 로위나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그의 손에 죽는 건 나니까…. 내 목숨이 보증수표가 되는 셈이죠.”
덤덤하게 엘렌에게 죽을 거라고 가정하는 그녀에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걸로 안심되었다면 좋겠군요.”
“…….”
미묘하게 흘러가던 잠시간의 침묵을 깨트린 건 어머니였다.
“로드리고, 전 황궁으로 가보겠어요.”
“테클라.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방금 해결하겠다는 말을 꺼낸 건 피차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닌가요?”
어머니는 명쾌한 답을 찾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이 가면 되겠군요. 로드리고.”
“위험해요.”
나는 진심으로 한 말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말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가문보다 내 딸이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나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당신이 가서 무얼 하겠다는 말이오.”
“폐하를 만나 뵈어야지요.”
“만나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려보도록 노력해야죠.”
“폐하가 당신 말을 들어주기나 하겠소?”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한 말인데요?”
“신하로서…….”
“하아.”
어머니는 이마를 짚으며 의도적으로 큰 한숨을 쉬었다. 그에 아버지는 민망한 듯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같이 갑시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오히려 여기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단다. 그리고 우릴 걱정할 때가 아니야, 로위나. 나는 네가 더 걱정이구나.”
건네는 말과 행동이 조금 어색해도 어머니가 나를 담는 눈동자엔 똑같이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왜인지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아 부러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잘 해결되면, 맛있는 저녁 식사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