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벌써 정오가 지나고, 엘렌을 걱정하며 뜬눈으로 창밖을 보던 나는 방 안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본 곳에 두 명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발견하고 기함했다.
“헉!”
귀, 귀신이다! 진흙탕에서 구르기라도 하고 온 듯한 여자가 내 안부를 묻는다.
“공녀, 괜찮나요?”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인영에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공포 영화도 아니고, 무슨 등장이 이렇게 인기척도 없는 거람.
“졸도할 뻔했어요”
그런데 누구냐고 묻기 전에 터키석처럼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황녀 전하?”
이렇게 빨리 재회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무례를 잊고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머리뿐만 아니라, 그녀가 입은 황궁 시녀의 옷까지 흙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고고한 눈빛과 표정은 한결같았다.
꾀죄죄한 모습이지만, 감옥살이를 하며 탈옥까지 한 사람의 안색치곤 양호해서 다행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건강해 보여서 보기 좋아요. 백작 부인이 편해요, 공녀 쪽이 편해요?”
“편하신 쪽으로…….”
“그럼 로위나라고 부를게요.”
“아, 네…….”
그건 아까 말씀하신 선택지에 없었던 것 같은데요.
베로니카 황녀는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로위나도 원하면 베로니카로 불러요.”
“제가 어떻게 감히 전하의 존함을…….”
아니, 이분이 점점 왜 이러시는 거지.
갑작스레 친근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당혹스럽기만 했다. 베로니카 황녀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인위적인 웃음을 지우고 평소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세상만사가 귀찮고 무료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쉽네요, 친한 사이가 되면 서로 배신하기 쉽지 않을 텐데.”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는 신뢰를 논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전하.”
“그렇죠, 나랑 안셀모처럼. 가족끼리도 배신하는 세상이니.”
딱히 그녀를 겨냥할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 가버려서 난감했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전하, 어서 갈아입을 옷을 드릴게요.”
나는 엘렌에게 눈짓했다. 내 속마음을 읽었을 텐데, 그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뭐 해. 전하를 언제까지 이렇게 내버려 둘 거야?”
“내 마법은 로엔 거인데.”
약간 말의 뉘앙스가 이상해서 주춤거리던 나는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괜찮겠네.”
문제가 있냐는 듯 쳐다보자, 엘렌은 예상하지 못한 듯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의 마법으로 완전히 깨끗해진 황녀는 신기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보면 마법사는 참 쓸모가 많군요.”
청록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종이처럼 하얀 황녀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마법이 쓸모가 많다는 말이 아니라 마법사가 쓸모가 많다는 어감은 묘하게 달리 느껴졌다.
“엘렌 알렉산드로. 황궁에 마법사를 양성시킬 생각은 없었나요?”
“보다시피 나는 로엔의 소유라서.”
엘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베로니카의 시선도 나에게 향했다. 나와 엘렌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알 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상상을 하고 계세요?”
“한편의 치정극?”
“그런 상상하실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괜찮아요, 나 입 무거워.”
환장할 노릇이다. 나를 보고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저 녀석이 내 소유가 된 거지?
“아주 먼 옛날부터?”
“환불할래.”
“안 돼. 한 번 가지면 영원히 가져야 해.”
턱에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하며 장난스레 하는 말에 평소라면 태연히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왜인지 뺨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대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는 듯 황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았다. 민망해진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식히며 빠르게 주제를 전환했다.
“전하, 무엇을 하면 될까요?”
이렇게 바로 도와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황녀는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로위나가 신전으로 가줬으면 해요.”
“신전이요?”
신전이라면 교황과 사제들이 있는 곳이 아닌가.
“안셀모는 로위나의 영혼을 이용해서 시간을 돌렸어요. 그리고 교황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으니 그에 대한 걸 증명해줄 거예요.”
“안 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엘렌이 정색하며 먼저 끼어들었다. 황녀를 담은 연두색 눈동자는 서늘하고 차가웠다. 급격히 경직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 나는 엘렌에게 말했다.
“엘렌, 왜 그래.”
“황녀님, 질문 하나 할게. 왜 로엔에 대해 안 물어봐?”
“아니, 무슨 말을…….”
나는 그녀 대신 입을 열었다. 황족에게 반말을 쉬이 꺼내는 그의 무례하고 당당한 태도에 황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그의 말투를 지적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엘렌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로엔의 영혼이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았다면, 이 안에 있는 영혼은 누구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엘렌이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얘기였다. 본래라면 영혼은 제물로 쓰여 이 몸 안은 건전지가 빠진 인형처럼 텅 비어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었으니.
그러나 황녀는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넘기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해. 이건 자칫하면 로위나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 황녀님은 남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닌가 봐?”
엘렌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황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교황이 판단할 일이에요.”
“만에 하나라도, 교황이 로엔을 이단으로 몰면.”
그에게서 낯선 살기가 흘러나왔다. 웃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광기가 느껴지는 엘렌의 눈빛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내 쪽에선 선택지가 하나라서 어쩔 수 없어지거든. 물론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전에 차단하는 방법이 더 쉽겠지만 말이야.”
“황족을 상대로 협박을 하는 그림도 신선하고 재밌네.”
황녀는 혼잣말하듯 가볍고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었다. 나는 뜨악 놀란 얼굴로 엘렌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단이라니?”
“안에 있는 영혼이 진짜 로위나 카시어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윗분이 영혼을 걸고 시간을 돌렸던 사실이 밝혀지겠지.”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베로니카 황녀는 나에게 신전으로 향하라는 말을 했을 터였다. 영혼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황태자의 행각을 고발할 수 있는 제일 쉬운 길이었다.
나 하나만 움직이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엘렌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교황이 다른 세계에서 온 로엔의 영혼이 무결하다고 판단을 내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잠시만.”
비로소 엘렌이 말하려는 바를 이해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점차 뜨거워졌다.
“날…… 무슨 악마 취급할 거란 얘기야?”
“종교 재판이 열릴지도 모르지.”
그 말을 하는 엘렌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그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베로니카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야트막한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설명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나는 베로니카 황녀에게 설명을 부탁했지만, 이미 속은 그녀에 대한 불신이 끝도 없이 커진 상태였다. 만약 엘렌이 중간에서 막지 않았더라면, 순진하게 그녀의 말대로 신전을 찾아가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공녀의 보증인이 될 테니까.”
“보증인이요?”
“그래요, 공녀가 불순한 영혼이 아니라고 보증하는 사람이요.”
“어, 그게…….”
신전에 받아들여지는, 타당성 있는 보증이 될까요.
묻고 싶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특히나 윗분에겐 무시하는 발언처럼 여겨질까 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내 생각이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모양인지 베로니카 황녀가 말했다.
“용의 축복을 받은 황족의 영향력은 그리 작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해야 할 건 이쪽이 아니에요. 로위나.”
베로니카 황녀는 한번 눈을 깜빡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안셀모가 로위나를 신전에 고발할 증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도 높은 확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