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베로니카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이번 판에선 안셀모한테 졌네. 끌고 가.”
베로니카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승줄이라도 챙겨왔을 줄 알았는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줄 없이도 데려갈 수 있다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네.
베로니카의 얼굴에 작은 냉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도망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이상,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있습니까?”
“없어. 시간을 돌리는 데 필요한 건 하얀 뱀과 인간의 영혼이지만, 뱀의 사체는 시간이 되돌려지면서 사라졌을 거고 인간의 영혼은… 잠깐만.”
베로니카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이 가능성을 점지하지 못했다. 왜 시간이 돌려진 후 카시어스 공녀의 행동이 달라진 거에 대해 의심을 한 번도 품지 않았던 것인가.
베로니카는 저가 눈앞에 증거를 두고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증거가 아닌, 증인에 가깝지만.
어쩌면 카시어스 공녀는 시간의 역행을 알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영혼이 그녀의 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를 만나봐야 했다.
“카시어스 공녀, 알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조사단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로니카는 바로 그녀의 뒤를 캐었다. 과거가 너무 깔끔한 여자였다.
전형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기록이 없는, 신분 세탁을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녀가 카시어스 공녀라는 정보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그걸 알자마자 조사단에 자원해서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모릅니다. 왜 묻는 겁니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모른다…. 그러면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은 알겠지. 우리가 함께 있던 조사단의 단장이었으니까.”
물론 결혼 중매 업체에 드나들던 공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덧붙이는 황녀의 말에 리카르도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일에 왜 그녀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점점 날카롭게 변하는 리카르도의 눈빛을 알면서도 베로니카는 말을 이었다.
“그녀가 증인이 되어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베로니카는 속으로는 그 이야기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자선사업가도 제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한발 물러나기 마련이다.
이런 골치 아픈 일에 증인으로 나선다는 건 황태자와 척을 지겠다는 의미인데, 목숨을 걸고 증인을 서줄 사람은 베로니카의 휘하에 있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없을 것이다.
‘그럼 안셀모도 이미 알고서?’
그걸 이미 알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카시어스 공녀를 둔 것이라면.
이제야 안셀모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자 카시어스 공녀에게 부단히 관심을 가지던 이유를 깨달았다.
퍼즐이 점점 맞춰지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 게 분명하지만 늘 지루한 표정만 짓던 베로니카의 입가에 처음으로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리카르도가 조용히 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카시어스 공녀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베로니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강렬히 꽂혔다. 그 시선을 느낀 베로니카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설마 그 영혼에 오필리아가 연관이 되어 있는 겁니까?”
“타고난 무인인 줄 알았는데, 머리 회전도 빠르구나.”
베로니카는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그의 연심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궁리했다.
“안셀모가 황궁을 나갔다고 했지? 그럼 공녀는 오늘 출근했고?”
대답이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길어지는 침묵엔 옅은 살기가 잔류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잡으러 간 게 아니라, 공녀를 잡으러 간 걸 수도 있어. 그녀가 안셀모가 벌인 일을 증명할 유일한 증인인 셈이니까. 부디 지금은 살아 있었으면 좋겠는데.”
덧붙인 말은 진심이었다.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리카르도가 황태자에게 오필리아를 조사단에 앉힌 이유를 물어도 그에게선 늘 사건의 ‘관계자’라서 그렇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일 리 없었다.
황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황태자가 오필리아를 죽일 작정이라면, 그녀를 죽인 후 반란군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사단장으로 앉힌 건가.’
언제든 반란군의 암살로 위장하기 쉬운 위치였다.
모든 정황은 황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꽉 다물린 턱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도드라졌다. 당장이라도 오필리아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베로니카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 문으로 향하는 리카르도를 붙잡았다.
“잠깐만. 공녀의 안부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어?”
리카르도의 시선이 다시 베로니카에게 닿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시선은 따가웠다. 시선이 칼로 되어 있다면 바로 찔려서 다칠 것 같았다. 공작이 이토록 날이 서 있으면서 동요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반면 베로니카의 시선은 무기질을 마주하는 듯 차분했다.
“이대로 나가면 황태자에게 반목하겠다는 의미라는 걸 모를 리는 없겠지. 확실한 결론을 짓지 않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이대로 에르도안 공작이 황태자를 찾아 막는다면 베로니카에겐 확실히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이용하는 건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확실히 해.”
멈칫하던 리카르도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그가 그녀를 직시했다.
“요청드릴 게 있습니다.”
“요청?”
베로니카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서렸다. 리카르도가 나한테 요청을?
“지금 황태자 전하를 황궁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황녀 전하입니다.”
“그러니까 나보고 미끼 역할을 해달라?”
“예.”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는 미끼라는 단어에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카르도를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증인을 잃는 일은 베로니카에게도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건이었다.
“대신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황녀를 제도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론 황태자가 돌아오질 않을 공산이 있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퍼트릴 생각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궁에선 잠시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을 보내도록 하죠. 그리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왔는지 리카르도는 황녀의 머리 위에 있던 핀을 가져갔다.
베로니카는 한발 늦게 그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찰나의 순간이라 언제 그가 자신의 머리에서 머리핀을 가져갔는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걸 잠깐 빌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갔다.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의미였다.
“독특해.”
베로니카는 핀이 뽑혀나가 길게 풀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에르도안 공작이 공녀를 좋아한다는 거에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그런 결단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리는 그의 성격에 안심해야 할지 분간이 안 됐다.
베로니카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낡은 침대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거슬렸던 모양인지 바닥에 기절한 시녀가 ‘으음.’ 하며 뒤척였다.
자연스레 베로니카의 시선이 시녀에게 옮겨붙었다.
시녀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얼굴로 쿨쿨 잠들어 있었다.
문 너머로 에르도안 공작을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했던 시녀였다.
황녀는 턱을 괸 채 시녀의 잠든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시녀의 얼굴에 큰 멍이 있었다. 개 문 사이로 황녀가 손을 뻗어 그녀를 끌고 들어오면서 생긴 생채기였다.
자신을 끌고 온 이가 베로니카라는 걸 알고 발버둥 치다가 혼자 머리를 박았던 거였지만 말이다.
“이런, 미안해라.”
그렇다고 이렇게 큰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었는데. 완전히 커다랗게 혹처럼 부어오른 걸 보니 마치 불한당이라도 된 느낌이라 썩 좋지만은 않았다.
“불경죄는 눈감아줄 테니 그거로 퉁 치렴.”
잠드느라 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는 저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곤히 잠든 태평한 얼굴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무감한 표정 아래 작은 슬픔이 드러났다.
바보 같은 자식.
누군가에겐 절대 닿지 않을 욕을 하며 베로니카는 피로한 눈으로 작은 창살을 보았다.
보기 싫을 만큼 화창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