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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06화 (107/124)

106화

침실에 들어온 카시어스 공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문지르며 의자에 앉았다. 흡사 무언가를 씻어내는 듯한 행위 같았다. 맞은편엔 그의 부인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하아…….”

공작은 차마 응접실에서 내뱉지 못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차 대신 물잔을 쥐고서 며칠 동안 물을 못 마셔 갈증이 인 사람마냥 벌컥벌컥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속이 탔다. 가슴 속엔 홧홧한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로위나의 이야기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믿기지 않은 거짓말이지만, 가슴은 계속 저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황태자는 제 딸의 영혼을 팔아먹고 시간을 돌린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한 공작의 눈꺼풀에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

침실 안은 침묵이 흘렀지만 묘하게 어수선한 느낌이 흘렀다. 각자 생각에 사로잡혀 잔잔한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듯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채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공작 부인이 저와 같은 눈빛을 하는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아이한텐 무슨 말을 하셨어요.”

“……별말 하지 않았소.”

“그 일은 어떡할 거예요.”

그녀는 로위나가 말했던 황실에 대한 일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아까부터 혼란스러움만 가득했던 공작 부인의 얼굴에 다른 감정이 싹을 틔웠다.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서린 감정은 정확히 분노였다.

“이미 그 부분은 부인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소?”

그 눈빛을 본 카시어스 공작이 말했다.

“이미 로위나가 암살 시도를 당했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어요.”

“…….”

“난 섬기는 분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보다 내 딸의 목숨이 더 중요해요. 그분이 저희보다 아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것처럼요.”

어릴 적 황제와 꽤 각별한 친구 사이였던 공작 부인은 더욱 배신감에 물들었다. 로위나의 말대로 황제가 쓰러진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제 아들이 로위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말할수록 분노가 온몸을 집어삼켜 격정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를 본 공작이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을 뗐다. 작은 불길이 담긴 듯한 다홍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반목이라도 하자는 말이오?”

“우리 딸의 영혼을 판 사람이 황제가 되는 꼴은 못 봐요.”

“테클라, 이건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결정할 사안이 아니오.”

“로드리고. 황태자는 내 딸을 두 번 죽일 뻔했어요.”

그녀의 분노가 쉬이 가라앉을 모양새가 아니었다. 카시어스 공작은 수심이 깊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 아래엔 부인과 다를 바 없는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 * *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리카르도는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의 스산하고 차가운 눈빛과 마주친 기사들은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유가 뭐지?”

“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리카르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사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훈련이 잘된 명예기사들이었다.

평소 황궁의 보초나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아닌, 황태자의 기사들이었다.

“폐하의 상태는?”

기사들은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차도가 없습니다.”

“직접 보았나? 직접 본 게 아니라면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군.”

막아서는 기사들을 뚫고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듯 앞서는 리카르도의 행동에 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렇게 막더라도 공작이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굳힌다면 막을 여력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그가 이긴 이유는 전술이 아닌, 오로지 힘이었다. 사람의 실력으로 보이지 않는 무지막지한 완력과 검술 실력으로 그는 빠르게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를 막을 수 없다고 파악하자 이 중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빠르게 대꾸했다.

“확인했습니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은 없나.”

“예.”

푸른 눈동자가 기사에게 꽂혔다.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위압감에 기사는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면 제국의 용을 걸고서 맹세할 수 있나?”

“…예. 맹세합니다.”

대답한 기사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뭉근히 보던 리카르도는 완전히 발걸음을 돌렸다.

‘나조차 보지 못하는 용안을 황태자의 기사들은 직접 봤다는 얘기인가.’

느긋했던 리카르도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걸을수록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이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그의 앞엔 뒷간처럼 보이는 낡은 건물이 보였다. 리카르도는 품에 있는 종이를 꺼내었다. 황녀가 건넨 지도는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그 주위를 서성이다가 작은 문을 발견했다. 건물과 같이 낡은 문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드나들기엔 턱도 없이 작은 문이었다. 큰 개들이 드나들 용도로 만든 듯한 크기의 문이었다.

‘사냥개를 키우는 곳인가.’

예전에 황궁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는 황족들의 유희 거리 중 하나였다.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 저들끼리 사냥개를 키워 자신의 개가 얼마나 사냥을 많이 하는지 겨루는 대회였다.

이 건물은 그 개를 키우던 우리로 보였다.

황궁의 사냥개들은 흉포하고 사나워서 직접 들어가 관리하지 못했기에 사람이 들어가는 문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개문에 손을 대었다. 잠겨 있을 거란 생각과 다르게 문은 손쉽게 열렸다.

포복하듯 안으로 들어온 리카르도는 칼에 손을 올렸다. 안에 있는 사람의 기운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황녀고, 다른 한 명은…….

완전히 발검하지 않은 채 리카르도는 침대 뒤로 훌쩍 뛰어넘었다. 예상대로 한 사람은 황녀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황녀의 옷을 입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시녀의 옷을 입은 황녀와 황녀의 옷을 입은 시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렵지 않은 광경이었다.

“에르도안 공작, 인기가 많던데.”

황녀는 피식 웃으며 시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까 문 앞에서 수다를 떨며 맹랑한 말을 하던 아이였다.

“그리 겁먹지 말아.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황녀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했지만, 외려 천으로 입이 틀어막힌 시녀의 눈망울엔 더욱 눈물이 들어찼다.

시녀의 뒤에 있던 황녀가 턱을 까닥였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신호에 따라 빠르게 시녀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추후 깨어나면 시녀는 자신이 왜 기절했는지조차 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날 위해 이렇게 한다는 건 완전히 내 편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뜻인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다소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밝은 말투로 묻는 황녀에게 리카르도는 묵묵히 용건에 대해 말했다. 황녀도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하게 물었다.

“기사들이 순순히 들여보내 줬어?”

리카르도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확인하셨습니까?”

“…….”

황제의 용안을 확인했냐는 물음에 베로니카는 그때의 일을 상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가리던 모자를 침대 위로 던지고 그 위에 앉았다.

“그저께 확인했었는데 아주 멀쩡하셨어. 연도의 앞자리가 바뀌시는 것까지 보고 떠나실 만큼.”

제국력의 숫자 앞자리가 바뀌려면 족히 50년은 흘러야만 했다.

“그걸 묻는 걸 보니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네.”

“……하지만 기운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리카르도는 침실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독에 당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건강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폐하께서 베로니카 황녀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도 거짓인 건가.

“에르도안 공작, 황족이 범할 수 있는 금기를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 말을 서두로 베로니카는 그간 있던 일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베로니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말하는 것은 그녀의 상황에서 큰 도박이었다. 물론 판돈은 목숨이었다. 리카르도의 푸른 눈동자는 작은 창가를 향했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베로니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실 에르도안 공작에 따라 자신의 명운이 달렸다는 것에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지만,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이 금기를 외부 사람이 알게 해선 안 돼.”

무고한 사람의 영혼을 대가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니.

반역 무리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좋은 먹잇감만 될 뿐이었다. 일순 엘렌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스쳤다. 그 이상으로 외부에 흘러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오늘 새벽에 급히 궁을 벗어나셨습니다.”

안셀모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안셀모한테 직접 이야기를 듣기 전엔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리카르도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꼴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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