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05화 (106/124)

105화

“설마 우리 아이는 천재였느니, 범재를 뛰어넘었다느니. 그런 생각만 하고 계시진 않았을 것 같아요. 천재라고 해도 애는 아이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분들도 아니잖아요.”

“…….”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그저 가문에 논란이 생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풍토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릴 적 내 모습에 이상함을 감지했으면서도 침묵했으리라.

솔직히 가문의 일로 치면 이 정도 일은 그리 심각하게 짚고 넘어갈 사안은 아니긴 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은 달랐다. 이따금 책에 빠져 다른 사람들과 말을 거의 섞지 않은 내 모습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묘한 시선으로 보곤 했다.

“이 이상의 근거는 따로 없어요. 황녀님을 믿지 않으시는 상황이라면요.”

반역으로 몰린 황녀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그들에게 이것으로 설득하지 못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 나 또한 목이 말라 찻잔에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입을 대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내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이 일은 유감이에요.”

덧댄 말에 환상에서 깨어난 얼굴을 한 어머니는 흰 백지에 떨어진 검은 먹이 점점 퍼져나가듯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기가 힘들어 애꿎은 티스푼만 만지작거렸다.

만약 황태자가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더라면 필히 로위나는 이 집을 나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부모님의 뜻을 큰 불만 없이 따르는 얌전한 숙녀였거나, 아니면 불만이 있으면서도 그걸 꾹 참는 인내심이 많은 여자였겠지.

그랬었더라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양쪽 모두 마음이 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여 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두 두 사람이 믿는다고 해도 나에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지금 로위나의 몸에 있는 영혼이 진짜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한 두 분의 심정이 어떨지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까웠다. 사실 이 얘기를 할 때부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내내 두려웠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이 내 탓이 아니었건만, 그녀의 몸을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각자 혼란에 빠진 어수선한 분위기를 종결시킨 것은 아버지였다.

“왜 그런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가 말했다. 나와 같은 다홍색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네?”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넌 카시어스 장녀고… 내 딸이다.”

늘 듣기 싫었던 고집스럽고 단호한 말투였지만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는 묻지 않았다. 네 안에 있는 게 로위나가 아니면 대체 누구냐고.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곳에서 깨어나기 전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눈앞이 아득했을 것이다.

이미 20년 넘게 살아왔는데 나는 사실 로위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어긋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아왔던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걸 묻는 대신 나를 제 딸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눈빛엔 복잡함이 여전했다. 이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매사에 늘 솔직하고 표정에 드러나서 지금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구나.”

“……만약.”

이 상황에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보니 불쑥 입이 열렸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영혼이 소멸되지 않은 딸이 두 분의 바람대로 숙녀로 자라고, 얌전히 동생에게 후계위로 물려준 뒤 가문에 도움이 되는 혼처와 결혼하는 삶을 살았더라도. 괜찮으신가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돌아올 대답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만약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떡하지?

대책도 없이 물어본 내 자신의 혀를 씹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이건 묻는 쪽에서도 대답하는 쪽에서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전제부터 틀렸다.”

아버지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떠한 정보를 접한 그가 정보 속에서 오류를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찻잔을 매만지며 시선을 모로 돌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일면 소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시는 걸까.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어제 사과하실 때도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가 후계자가 될 일은 없었을 게다.”

“왜요?”

내 반문에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의 표정에서 해답을 얻은 내가 대신 말했다.

“여자라서요?”

“…….”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여덟 살에 있던 일이었다.

내가 글자를 모두 익힌 후부터 가르치던 가정교사가 어느 날, 더 이상 나에게 가르칠 건 없다면서 진지하게 아버지에게 얘기하던 적이 있었다.

그간 내 수업 태도에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말 있는 그대로 학습 진도의 속도가 빨라서 ‘정말로 가르칠 게 없다.’라는 이유였다.

처음엔 아버지는 전자로 해석하며 나를 꾸짖으려고 했지만, 가정교사의 말에 어딘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루 뒤, 아버지는 가정교사에게 퇴직금을 건네주고 나를 정식으로 후계자로 세웠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왜 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내렸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내린 아버지의 결정이 그렇게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렵게 결정을 내리셨는데 번복은 쉽네요.”

조금 앙금처럼 남은 그 일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버지의 눈가에 있던 주름이 수심으로 깊어졌다.

“……네 말대로였다. 로디안을 후계자로 만들라는 압박이 있었지.”

나는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아버지에게 압박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황제밖에 없었다.

“네 말대로라면 시간을 돌린 걸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널 후계자에서 밀어내라는 명령엔 그 일과 연관이 있었을 테지.”

중후하게 울리는 음성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말할수록 그림자가 드리워지듯 어두워졌다.

“넌 위험 요소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어머니를 흘긋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어머니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핼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쉬고 싶군요.”

그녀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하녀에게 몸을 기댄 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동안 끝내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핏 본 그녀의 시선에 미약한 분노가 있었다. 저 분노가 나를 향한 건 아닐까.

입을 꾹 다문 채 찻잔만 쳐다보고 있으니, 아버지가 말했다.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이니 마음 쓰지 말아라.”

“……살면서 제가 아버지한테 위로를 받는 날도 오네요.”

“위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네, 그렇군요.”

누군가를 위로하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아 겸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작게 쿡,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아버지가 인상을 팍 구겼다.

“비웃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하늘 같은 아버지를 어찌 비웃겠어요.”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하기는.”

다시 말투가 퉁명스러워진 아버지에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억눌렀다. 예전에는 위압적이고 고집스러운 저 말투 하나하나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지금은 태연하게 흘려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이 일이 황태자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릴 거예요. 그러면 또 무고한 영혼이 소멸당할 거고, 그 영혼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그 마법을 실행하는 사람조차도요.”

이미 그에 희생당한 사람이 로위나였다. 그 점을 떠올릴 때마다 소설 속에 적힌 설정 하나를 마주하는 듯이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에 그가 시간을 돌리면 다음 희생양이 누가 될지 모른다는 무형의 불안감은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후우…….”

골이 아픈 얼굴로 아버지가 머리를 감쌌다. 이마를 짚은 손에는 주름이 가득 잡혀 있었다.

고작 7년인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20년 이상 흐른 것처럼 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아버지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이 상황에서 곧바로 황제의 편을 들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겐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빨리 결심을 세워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