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당황한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데리고 온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 글쎄요. 모르겠어요.”
마침 갑자기 사라진 그를 찾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의 말에 움찔거렸다.
“왜 찾으세요?”
“내가 생각하는 그 아이가 맞느냐?”
아버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맞다고 긍정하면 곧바로 노성을 터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손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흘렀다.
저택 내에 위험 인자가 있는 사람을 데려온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네…….”
죄인이 된 심정으로 긍정을 토해냈다.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깊은 단전에서 흘러나온 듯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알렉산드로의 첫째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겠나.”
아버지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네가 지금 무슨 일에 관여한 건진 알고서 말하는 것이냐?”
“네, 두 분께서 대화 나누시는 내용 다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놓고 대화를 엿들었다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버지는 허,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수로?”
“능력 좋은 친구의 도움으로요.”
“엘렌 알렉산드로와 같이 있었느냐?”
“네.”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내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내 대답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 일을 대공은 알고 계시고?”
“그것까진…….”
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대공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가 엘렌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미 그가 깨어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대공은 엘렌과 황녀 사이에 있던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엘렌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 추가 더 얹어졌다. 거의 그를 10년 넘게 가까이서 보아온 직감이었다.
“이 일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든지 간에 넌 여기서 빠지거라.”
“아버지, 아까 그 질문은 왜 하신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고 말을 이었다. 내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는 그에 꾸중하지 않고 의문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폐하께서 진짜로 쓰러진 게 맞냐는 거요.”
“넌 몰라도 된다.”
“저도 모르고 싶어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넌 이미 이에 대한 것도 알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냐?”
“아버지는 황녀 전하께서 잡혀갔던 결정적인 증거를 알고 계세요?”
“그것이…… 황녀 전하의 방에서 폐하께서 마셨던 독극물이 나왔다고 했었지.”
“그리고 시종이 황녀가 시켰다는 증언까지 나왔었고요. 하지만 그건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면 되는 거니까 사실관계를 확실하게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죠.”
“황궁의 시종을 누가 마음대로 조종한단 말이냐. 아무리 하급 귀족들이라도 어지간한 귀족들은 그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황족들은요?”
“네 말뜻은 태자 전하께서 모두 꾸민 일이다?”
“거기에 한 사람 더요. 어쩌면…… 두 사람일 수도 있고요.”
“직계 황족은 네 분이다. 황녀 전하를 제외하면 세 분인데 그분들 모두가 가담한 일이라고?”
아버지는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혼란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폐하라면 몰라도 황후 폐하까지 그런…….”
“역시 아버지도 폐하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그런 불경한 의심은 품은 적 없다.”
내 말에 곧바로 아버지가 얼굴을 굳히며 단호히 대답했다.
“폐하의 의중이 궁금하셨던 것뿐이겠죠. 아버지는 늘 폐하밖에 모르시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심지어 부모님의 결혼조차 황제의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황제의 어릴 적 친구였지만, 아버지는 황제의 친구가 아닌, 신하에 가까운 사이로 어머니보다 더 황제를 따르고 있었다.
“유감이 많은 얼굴이구나.”
“많긴 해요.”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빠르게 긍정할 줄은 몰랐는지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를 쏘아보는 얼굴에 나는 이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후계위를 포기하라고 강요당한 이유엔 오로지 아버지의 생각만 있었나요?”
“…….”
아버지는 수심이 깊은 얼굴로 침묵했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 황제는 새로 태어난 장남에게 후계위를 계승하라는 의견을 넌지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카시어스 가문의 대소사에 황제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가주로서 썩 밝히고 싶지 않은 일일 터였다.
금방 내 말에 긍정하고 황제의 개입은 부정하리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의외였다.
“생각보다 답이 늦으시네요. 바로 긍정하실 줄 알았는데.”
“넌 애비의 마음을 모른다.”
“모르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이라도 말대꾸를 안 하는 법은 없느냐?”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요.”
“허.”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끝?’
최소한의 꾸중이라도 돌아올 줄 알았으나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다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할지 말지 수십 번도 고민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히 돌리기 위해선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 * *
나는 황태자가 오기 전에 그들과 나눴던 대화에서 숨겼던 이야기를 모두 말했다. 가능한 그 부분은 알리지 않고 일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가문의 도움이 필요해진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을 돌린다니……?”
믿기지 않는지 두 사람 모두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했던 말을 재차 곱씹었다.
“대가는 영혼이고요.”
“영혼? 무슨 영혼을 말하는 것이냐.”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영혼이에요.”
아버지는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끄응,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하나 그것 또한 모두 황녀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냐? 근거는?”
출처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할 말을 골랐다.
본래라면 이런 이야기에 근거를 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이 집의 딸이 금기의 제물이 되어 희생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지.’
나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근거는 저예요.”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다.”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본 나는 깨달았다. 진실을 말할 시점이 온 것이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로위나의 영혼이 희생당했어요.”
“지, 지금 무슨 말은 하는 거니?”
두 사람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흡사 제 딸이 미친 게 아닌지 걱정과 우려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조금 피곤해져서 열이 오르는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잠시 식혔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황태자가 시간을 돌리기 위해 한 짓을 설명하려면 이 부분만 쏙 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언제까지 가족에게 숨기며 묵과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조금 시기가 빠르긴 하지만.’
마음의 준비도 할 시간이 없는 상황이 조금 야속하게 여겨졌다.
내가 말을 덧대자 두 사람의 눈빛에 어린 걱정이 아까보다 더 진해졌다. 정말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진심으로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증명하지.’
무턱대고 말하긴 했으나 내가 진짜 로위나가 아님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로위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 쉬는 게 어떻겠니……?”
“그리하는 게 좋겠구나.”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절 키우면서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던가요? 분명 애가 애답지 않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아주 갓난아기일 때부터, 바로 이 몸에 빙의했던 탓에 잘 울지도 않았고 입이 트이자마자 부모에게 칭얼거리는 애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 나는 책을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글자를 익힌 2살 때부터 일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서 천재로 치부해도, 2살짜리 아기가 역사 서적을 즐겨 읽는 건 누가 봐도 해괴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과하게 성숙했고, 조용했었죠. 지금 로디안을 키우시면서 알게 되셨을 거예요. 평범한 아이는 그렇거든요. 지금이 7살일 텐데, 한창 엄마 아빠한테 어리광부리고 놀기 좋아하는 나이죠.”
내 말이 적중했는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