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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03화 (104/124)

103화

‘에르도안 공작이 여기 있어.’

방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베로니카는 숨죽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황궁의 금기인 시간 마법을 이용한 것은 반역 다음으로 중죄로 엄히 다스려졌다.

이건 직계 황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황실 내에서 벌을 내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본래라면 금기를 범한 제 아들을 아비인 황제가 벌함이 옳지만, 이미 황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안셀모를 돕고 있는 상황이다.

이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에르도안 공작.

늘 무표정한 얼굴로 파수꾼처럼 황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관망하고 때론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에 옮기는 남자였다.

그와 접촉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가 지금 황제의 호위를 위해 황궁에 잔류하고 있는 것이라면 동선은 대충 예측이 되었다.

‘위치는 알고 있으니 내가 황궁에 있다는 것만 알리면 되는데.’

그녀의 수발이 되었던 아이들은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아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들이 접근해 오다가 베로니카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렌 알렉산드로도 없다면, 직접 그녀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작은 창 사이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이라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

되도록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때는 에르도안 공작이 궁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르도안 공작이 새벽 순찰을 돌고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최적이었다.

* * *

리카르도는 제도 밖으로 도망갔을지 모르는 황녀를 찾으라는 황태자의 명을 거부하고 모란궁 주변을 돌고 있었다.

내부에 반역 세력이 있는 것이라면 그자들이 다시 황제의 목숨을 노릴 수 있다는 명분으로 호위 자리를 지킨 것이다.

방금 있던 일을 떠올린 리카르도는 미간을 좁혔다.

황궁을 급하게 나서던 황태자가 수상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은 채였다. 황태자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바이올렛을 붙잡고 행선지를 물어도 극비라며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황태자가 황궁을 나서기 전날, 오필리아는 황궁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인가?

걱정하는 그에게 펠릭스가 오필리아는 수도 내에 있는 공작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의 말대로 가문에 돌아간 것이다.

리카르도는 이대로 오필리아가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지금 조사단은 폭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폭풍이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모두 함께 쓸려 사라지는 곳.

그런데 그 조사단장의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다는 사실은 리카르도에게 내내 불안과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마물에게서 빙벽을 지킬 때보다 더 촉각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잘된 일인가.’

그는 하루 보지 않았다고 어색하면서도 가라앉는 기분에 당혹스러웠다.

그녀를 생각하면 제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한번은 오필리아가 가문으로 돌아가면 그도 제 감정을 평소처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오필리아를 떠올릴 때마다 웅덩이 밑에 가라앉은 흙을 건지기 위해 하릴없이 손으로 휘젓는 기분이 들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채 길을 걷던 리카르도의 푸른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본래라면 하나둘씩 사람들이 깨어나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 여상 있는 일일 터인데.

누군가 인위적으로 모란궁에서 사람을 빼낸 것이다.

반면에 황제가 있는 방 앞은 경비가 삼엄했다.

황궁 내부 사람을 의심해서 모란궁 내에 일손을 배치하지 않은 것이라면, 제일 경계해야 하는 사람은 경비병이었다.

바로 옆에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리어스 기사들도 아니고, 황태자가 거느리던 기사들이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 라.

리카르도는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제가 정말 황태자의 편에서 황녀를 내치려고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굳이 이 방법을?

반역으로 몰지 않아도 황녀를 내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황족들이 흔히 쓰는 방법은 혼기가 찼다는 이유로 타국에 장가를 보내거나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국에 보내지 않고, 황실 내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상황이다.

황녀가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거나, 정말로 그녀가 반역을 꾸미고 있었다던가. 두 가지의 가능성으로 좁혀졌다.

‘베로니카 황녀.’

황태자는 반역자인 그녀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녀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황제가 마셨다고 한 독극물 하나였다.

그러나 황제가 쓰러진 것이 연극이라면 독극물의 존재가 모호해지기에 그녀의 죄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어둡고 차가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느껴지는 이상한 인기척에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시선을 돌리자 큰 수풀이 있었다. 성인 남자가 숨을 수 있는 크기였다.

그리고 천천히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풀을 깔끔하게 가로로 베었다.

“……!”

수풀에 한 여자가 뒤로 넘어졌다.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엔 시녀들이 쓰는 모자를 꾹 눌러쓴 채였다. 얼굴이 온통 흙범벅이었다.

눈동자는 청록색이지만,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황녀 전하.”

리카르도는 그녀를 보자마자 황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베로니카는 흠칫했다. 이렇게 쉽게 제 모습을 알아차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궁금한 것을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변장이 허술했나?”

“…….”

리카르도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어디 계셨습니까?”

“그거에 대답하기 전에, 에르도안 공작.”

새벽녘. 희미하게 밝아오는 빛에 청록색 눈동자가 더욱 뚜렷한 색을 띠었다.

“이 상황을 묵과할 거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를 리가 없어. 이 절차와 과정이 이상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황녀에게 길을 내주는 듯 몸을 틀었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습니까.”

“들키지 않는다면.”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내 무기질 같던 황녀의 눈빛에 처음으로 작은 이채가 어렸다.

* * *

“엘렌.”

황녀가 황궁에 있다는 사실을 접하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엘렌을 불렀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다.”

“황녀한테 가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다가 또 네가 위험해지면 어떡해.”

“한번 당한 마법에 또 당하는 바보는 아닌데.”

자존심이 상했는지 엘렌은 미간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나는 그의 감정을 헤아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그가 투덜거리는 것을 가벼이 무시했다.

“황태자 쪽은?”

“남은 사람 없이 다 빠져나갔어.”

“휴…….”

황태자가 이곳에 왔을 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황녀와 한통속으로 엮여 반역으로 몰리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당장은 불가능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엘렌의 말대로였다. 황녀가 갑자기 반역으로 몰린 것에 귀족 사회가 난리가 났는데 귀족파의 중추인 아버지마저 반역으로 몰린다면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찍어 누르고 일을 속행하려고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에르도안 공작이 큰 힘을 얻게 돼. 황태자가 그걸 반가워하진 않을 것 같은데.”

엘렌이 반박했다.

“아니, 리카르도는 이제 황태자가 경계할 인물에서 벗어났어.”

리카르도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황궁의 호위, 파수꾼의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급변했는데, 그는 오랜 시간 북부에 있어서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세력을 만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황위를 물려받기엔 준비가 덜 된 사람. 아무리 제국민들의 영웅이라도 중앙 귀족 원로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귀족 원로들은 그런 리카르도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보단 수상쩍은 데가 있더라도 황태자를 황위에 올리는 길을 택할 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빠르게 엘렌에게 눈짓했다.

지금의 모습을 들키면 안 되니 아이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의 모습에 당황한 나는 그를 찾았다. 지하 감옥에서 사라졌던 때와 같이 지독한 기시감이 들었다.

“엘렌!”

내가 소리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였다.

“로위나. 무슨 일이 있느냐?”

“아, 아무것도…….”

더듬더듬 말했지만 내 시선은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엘렌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황궁?’

황녀에게 간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가 이 시점에서 사라졌기에 행선지는 그곳으로밖에 예측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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