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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02화 (103/124)

102화

지금 상황이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평소처럼 장난이다, 농담이다, 하고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엘렌은 빙긋 웃으며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말했다.

“로엔은 우리가 연인이 아니면, 기분이 나쁘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가 내가 방금 했던 말을 고스란히 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점점 엘렌에게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 아닌데.”

아니, 바보처럼 말은 왜 더듬는 거지?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건지. 나는 절실한 눈빛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얼른 장난이라고, 농담이라고 말해.

내 마음속을 읽었을 게 분명한데도 엘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연한 미소를 지었다.

허둥거리는 나와 대비되어 웃기만 하고 있는 그를 보자 왜인지 오기가 치밀었다. 얼굴에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연인이 아니어도 기분이 안 나쁜데?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는 엘렌에겐 뻔히 들킬 의미 없는 거짓말이었다. 이제 이쯤하고 지나가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으나 엘렌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기울였다. 말간 연두색 눈동자는 뺨을 잔뜩 붉힌 채 인상을 쓰는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선 고맙다는 인사를 그렇게 한다고.”

“그랬었지.”

엘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나는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응. 그런 거야.”

“알았어.”

엘렌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저 미소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 되었든 지독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내가 로엔한테 고마운 일이 많은데….”

“아냐, 우리 사이에 고맙다고 할 필요가 있겠어?”

난 곧바로 엘렌의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잠깐 식었던 양쪽 뺨이 다시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대체 갑자기 얘가 왜 이러는 거람?’

당황스러웠다. 엘렌이 돌발적인 행동을 빈번하게 하더라도 이런 식의 행동은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건 내 반응이었다. 이런 사소한 대화에 나는 왜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처럼 부끄러움을 탄단 말인가.

전생이고 현재고 늘 일만 알고 살아서 이런 것에 면역이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빠르게 말을 돌리며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를 볼 때마다 계속 눈을 마주치니 기분이 이상했다.

“황태자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아직 응접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빤히 보이는 화제 전환에도 엘렌은 군말 없이 내 말에 대답했다.

“누구랑?”

“공작님이랑 마리어스 기사. 다른 사람은 안 보여.”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구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녀랑 엘렌 알렉산드로는 찾았습니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공작 부부의 방과 자제의 방들뿐입니다.

마리어스의 부단장 바이올렛의 목소리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자는 이곳에 있었더라도 마법으로 금방 자리를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바이올렛의 말에 황태자가 대답했다.

-황녀가 그와 같이 있었더라면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을 테니 곧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전하, 말씀 중 실례지만 대공자는 지금 혼수상태라고 들었습니다만….

당황한 목소리가 황태자의 말에 끼어들었다. 아버지였다.

황태자는 아버지에게 엘렌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했다.

-황녀가 혼자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더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하겠군요.

황태자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 엘렌도 엘렌이었지만, 황태자가 나에게 협박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가문이 위험해진다고 했었지.’

그의 경고가 그저 경고로만 끝나는 걸까.

뱀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얼른 황태자가 이대로 저택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는데-.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연 소리였다.

-전하, 당장 황궁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황궁에서 황녀를 발견했다는 연통이 도착했습니다.

‘뭐?’

놀란 나는 바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벌써 황녀가 행동에 옮겼나 보네.”

“그게 무슨 소리야. 황녀는 아무도 모른 곳에 잘 숨겼다고 했잖아.”

“응.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더라고.”

“설마 그게 황궁에 있다는 거야?”

엘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저것이 정녕 제정신인가.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반역으로 몰린 사람을 황궁 안에 숨기는 발상을 떠올리는 건 엘렌을 제외하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엘렌의 눈썹이 억울하다는 듯 휘어졌다.

“황녀가 먼저 제안했는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자신의 책임을 남한테 미뤄도 돼?”

“진짠데, 안 믿네.”

정색하는 나를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짓는 엘렌을 무시하곤 마법구에 다시 집중했다.

-황궁으로 돌아가죠.

황태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베로니카는 지금 과거 시녀들 몰래 숨어 있던 다락방에 있었다.

어릴 때 불안한 감정이 들 때마다 홀로 숨어들어와 있던 장소기도 하지만, 종종 안셀모와 숨바꼭질을 할 때 숨어 있던 장소였기도 했다.

당분간 황태자의 시선을 피해 제도 밖으로 떠나 있는 게 어떻겠냐는 대공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들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 이곳을 떠나면 영원히 도망자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숨바꼭질할 때마다 그녀가 여기에 숨으면 안셀모는 끝까지 그녀를 찾지 못해 항복 선언을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반역으로 모는 안셀모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혈육의 정 같은 감성에 젖은 것이 아니다. 머리로 생각을 해보아도 그녀 자신은 황위와 거리가 있었다.

그녀가 과거보다 사교계나 주요 귀족들을 만나며 연을 만들고, 나름대로 영향력을 키웠지만, 안셀모가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아버지는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와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최대한 타국으로 시집이 보내지는 결말만은 피하려고 발버둥 쳤다.

어느 부분에서 보던지 어차피 그녀는 아무리 발악해도 황좌에 다가갈 수조차 없는 위치에 있거늘.

황위를 빼앗길 걸 두려워한다면, 저보단 에르도안 공작을 경계함이 옳았다. 그러나 안셀모는 에르도안 공작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바로 처리하려고 했다.

심지어 황족에게 가장 모독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죄명까지 덮어씌우면서까지.

“그렇게 내가 꼴 보기 싫었나.”

베로니카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우애 깊은 남매지간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사람인 이상 이 사태에 완전히 초연할 수는 없었다.

다락방 안에 있는 헌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금방 제 감정을 지워버렸다.

사사로운 감성에 허덕이기엔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일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그런 행위를 질색했다. 누가 저를 동정하는 일도 싫었고, 저가 자신을 동정하는 일은 더욱 싫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직시했다.

확실히 드러난 사실은 황실이 그녀를 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황제까지 작정하고 움직인 이상, 귀족들이 그녀의 편에 서는 일은 당장 내일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의 종말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이쪽은 작은 기대조차 걸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일을 그녀 홀로 타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심 바라왔던 이룰 수 없는 염원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촉발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전부 그녀가 황실을 장악해야 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딱 한 남자가 생각났다.

‘엘렌 알렉산드로, 대체 어딜 간 거지.’

그는 어제 자신을 다락방에 놓고, 새벽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했으나 하룻밤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저밖에 모르는 다락방이라지만 수색망이 늘어나는 만큼 이곳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다락방 문 옆에 귀를 붙이고 앉았다.

종종 이 주변을 시녀들이나 시종들이 지나간다. 아무리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입을 단속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입만큼 관리하기 힘든 것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그들이 지나가면서 내뱉는 이야기들을 엿들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마침 두 명의 시녀가 다락방 문 앞에 앉아 걸레를 빨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일이야. 황녀 전하께서 폐하를 해하려고 했다니….

-그 일로 에르도안 공작님이 며칠째 황궁에 계신다지?

-응. 우리는 잘생긴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으니까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지 않니?

-어머,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맹랑한 동료의 말에 다른 시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아무도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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