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배신감이라 명할 것까진 없는 감정이지만, 예상했던 그대로의 상황을 직면하니 유쾌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간 제 고집대로 살아온 아버지에겐 당연한 선택이었을 텐데도.
찻잔을 내려놓은 나는 단조로운 말투로 말했다.
“제가 죽는다고 해도, 마음을 돌리실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니?”
어머니는 얼음처럼 얼어붙었고, 찻잔을 잡은 아버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목숨으로 협박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대답했다.
“어제 물어보셨죠. 제 옷이 왜 그렇게 피범벅이 되었던 거냐고.”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주신 선물 때문에 마부가 크게 다쳤었거든요.”
나는 한껏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엘렌의 마법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승길로 향하는 요단강을 건너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열이 받았다. 황태자를 만나면 그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었다.
“……?!”
“자객이 마부를 노리자고 온 건 아닐 테니 표적은 확실하죠.”
내 말이 끝나자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던 아버지의 얼굴엔 이젠 핏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의 얼굴을 본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지, 그걸 아직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다, 다친 곳은 없는 거니?”
어머니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의 빛으로 가득한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친한 친구가 걸어준 마법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평생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야 해요. 한 번 자객이 왔는데 두 번째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버지.”
오늘 들어서 처음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말에 그가 움찔거렸다. 누군가 낯선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듯한, 생경하고 오묘한 표정이었다.
“황족의 금기. 그건 타인의 영혼이 대가예요. 그 제물이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 혹은 로디안……. 그리고 제가 될 수도 있어요.”
이미 로위나는 제물이 된 적이 있던 몸이지만.
엘렌은 혹여 로위나의 몸 안에 있는 내가 제물이 될까 봐 미연의 방지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황태자를 처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황태자를 죽인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태자가 죽임을 당하면 황녀의 반역 혐의는 짙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녀의 무고를 증명해줄 증인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많은 귀족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귀족이.
나는 그에 가장 적절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시선에도 눈을 감은 채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이 나온 쪽은 그가 아닌 어머니였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구나. 로위나. 네 목숨이 위험하다는데 어찌 우리가 모른 척할 수 있겠니.”
“부인…….”
“어떡하겠어요, 여보.”
“…….”
보는 나도 가슴이 일렁거릴 만치 회한에 젖은 눈빛을 하는 어머니를 보니 갑자기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딘가를 피하는 것처럼 벗어나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것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고뇌에 빠진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의 눈 옆에 자잘하게 자리 잡은 주름들이 깊고 진해졌다.
실내엔 찻잔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한 적막이 흘렀고, 나는 테이블만 바라본 채 대답을 기다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거라.”
아버지의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을 본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여기서 그를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놀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카시어스 공작. 오랜만에 뵙는군요. 공작 부인도 안 보는 새에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황태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태자 전하, 여긴 어쩐 일로…….”
황태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일순이었지만 나를 보는 시선엔 서릿발처럼 찬기가 흘렀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온기가 은은하게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공녀. 황궁에 입궁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여기에 있었군요. 걱정했습니다.”
나를 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정말 걱정했다는 듯 보여 할 말을 잃었다. 마음 같아선 ‘당신만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습니다.’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의 뒤로 마리어스 기사들이 도열하여 서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침을 한번 삼켰다. 설마, 날 잡으러 온 걸까?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 휴직계를 낸다는 것을 잊어 버렸네요. 어떤 문책이 있든 달게 받겠습니다. 혹여 단장직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면 내려놓겠습니다.”
“공녀는 어쩐지 문책이 아니더라도 단장직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나에게 자객을 보낸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또한 저번에 가문을 두고 협박하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인가요?”
“혹시 이곳에 공녀 말고 다른 방문자가 있지 않았습니까?”
엘렌이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없었는데요.”
내 대답에 실내에 있는 모든 이가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제저녁 한 소년이랑 같이 왔다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의문이 선명하게 적힌 표정이었다.
“그렇습니까….”
황태자는 대놓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버지를 보았다.
“잠시 공작의 저택을 수색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황태자의 물음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시 황태자의 시선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가능하면 공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군요.”
연통도 없는 방문에, 더군다나 이러한 사안으로 방문한다는 것에 관해 아버지의 얼굴엔 떨떠름한 기색이 묻어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베로니카 황녀가 감옥을 벗어나고 이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입니다. 혹시나 공작이 모르는 새에 자택에 숨어들지 않았을까 싶어 한 번 방문했습니다.
-황녀 전하는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
-공,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베로니카 황녀는 보기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사람이거든요. 남의 시선을 피해 몰래 일을 벌이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이죠.
나는 방에서 엘렌의 마법을 통해 황태자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황녀를 잡으러 온 거였어.’
직접 황태자의 앞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님에도, 단조롭게 말하는 황태자의 음성에서 미약하게 묻어나는 악의에 한기가 스쳤다.
도저히 친누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그렇지만 황녀를 잡으려고 이곳에 왔다는 것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녀가 여기로 향하는 것을 본 목격자라도 발견이 된 것일까?
“엘렌, 혹시 황녀 전하께서 이쪽에 있는 건 아니지?”
“응. 여기 없어.”
“그럼 다행이고.”
그럼 황태자는 황녀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찾으러 온 것이었던가? 어제 바로 암살자를 보냈던 황태자가 다음 날 나를 찾으러 오다니. 몇 박자 늦은 감이 있었으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면 혹시…….’
나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시 어린아이 모습으로 돌아간 엘렌은 태평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널 찾으러 온 거 아닐까?”
“나를? 내 취향은 그쪽이 아닌데.”
엘렌은 유감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을 치며 여유를 부리는 그를 보며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고대 마법에 정신을 못 차렸던 사람이 대체 무슨 배짱인가.
“사람이 완벽하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로엔.”
“너는 물에 빠지면 분명 입만 둥둥 떠다닐 거야.”
“물속에서 숨 막혀서 죽을 일은 없겠네.”
꽤 나쁘지 않은 능력이라며 엘렌은 해맑게 웃었다. 그를 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황태자와 아버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아버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태자 전하, 폐하께서 정신을 잃으신 것이 확실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