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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99화 (100/124)

99화

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황태자가 그런 짓을 했다고?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영혼이 바뀐 거라면서! 그런데 아예 소멸이 된 거였다니….”

“이미 없는 영혼이고, 그로 인해 로엔이 불편해질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황태자는 이번에도 일이 잘못되면 타인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시간을 돌리려고 하겠지.”

앞에 그다운 인간미 없는 말에 머리에 열이 오르다가 뒤에 이어진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졌다.

그 짓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이상 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의문을 내뱉었다.

“그런 엄청난 마법에 제약이 없어?”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마법에 제약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제약이 바로 사람 목숨이야. 딱 한 사람.”

그는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흔들었다.

영혼 하나.

나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나……?”

황위가 사람의 영혼에 휘둘릴 자리가 아니었다.

엘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혼이 100개가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황태자는 시간을 되돌리는 짓을 기꺼이 실행할 터인데.

하나라니.

“그 하나는 황족에겐 해당이 안 되는 모양인가 보네?”

“유감스럽게도.”

엘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완전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 놓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황족들이 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시간을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거야.’

세상이 불공평하다 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마법이 그들에게만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건 별개로 기분이 썩어들어갔다.

“대체 그 마법이 뭐길래 황족들만 알고 있어? 설마 용이랑 관련된 거야? 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용?”

엘렌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무언이 긍정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

나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제국을 처음 세웠던 초대 황제와 친했던 용은,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디까지 잔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인간의 일이라고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 되었든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어디서 이야기 장수에게 지어낸 이야기나 설화를 듣는 것처럼 체감이 되지 않았다. 내 눈으로 영혼이 소멸되는 장면을 직접 본 것도 아니었으니.

아니, 직접 보지 않았던가…?

꿈에서 보았던 남자와 뱀들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 꿈이 그 일과 연관이 있을 리가.

“황태자가 시간을 돌리는 방식이 뭔지 알아?”

“한 가지밖에 몰라. 그마저도 옛날 책에 나오는 거라 정확성은 떨어져.”

그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아까 내가 집어 든 ‘델리아 왕국의 비밀스러운 문화생활’이었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엘렌이 말을 이었다.

“살아 있는 뱀이 쓰인다고 적혀 있었어.”

“살아 있는…… 뱀?”

심장이 미약하게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황태자가 ‘로위나’를 제물로 시간을 돌렸다는 것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깊은 속에서부터 거북함이 밀려왔다.

“클로비스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태는 현존하는 용처럼 도마뱀의 형태가 아니라 뱀이거든.”

“엄밀히 말하자면, 황태자가 건든 금기가 용의 마법인 거지?”

“응.”

“용의 마법인데 왜 용과 흡사한 뱀이 쓰이는 거야?”

“뱀은 뱀을 잡아먹기도 하니까.”

엘렌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입가엔 일말의 웃음기조차 없었다.

“가끔씩 뱀 중에 먹잇감으로 동족인 뱀을 더 좋아하는 부류가 있어. 용도 자신과 흡사한 뱀을 더 먹잇감으로 선호하지. 심지어 시간을 돌리는 행위조차도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영혼을 제물로 쓰는 일이니까 여러 부분에서 용의 마법에 쓰이는 재료로 뱀보다 더 적절한 건 없어 보이지 않아?”

“…….”

잔인하다 못해 역겨운 일들이었다. 온몸에 뱀들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맨살에 우수수 닭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넌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어?”

“황태자가 죽을 때까지?”

이제는 더 놀랄 일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폭탄 같은 그의 발언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누가 죽어?

“물론 황녀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해결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달렸지만, 만약 황녀가 실패하면 내 쪽에서 해결해야겠지.”

일을 해결한다는 말이 이토록 투명하게 보이기도 힘들 것이다.

이로써 엘렌이 베로니카 황녀를 빼내온 이유가 드러났다.

그는 그녀를 이용해 황태자를 죽일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황녀의 실패는 그녀의 죽음을 뜻하는 바일 터.

“황녀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셔?”

“물론.”

“그럼 지금 황녀 전하는 어디 계시는 건데.”

“황태자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궁금해? 로엔이 궁금하다면 말해줄 의향이 있는데.”

“……괜찮아. 찾을 생각 없어.”

황태자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건 그녀가 그에게 발각되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황궁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타의든 자의든 그곳에서 나왔는데 상황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누구는 도망자 신세고, 누구는 약속된 황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니. 단지 시간이 되돌려진 상태에서 베로니카 황녀가 다른 선택을 했다고 벌어진 일이었다. 기존의 로위나와 다른 선택을 한 나처럼.

그녀의 일을 떠올리자 내가 예전에 동생에게 후계권을 양도하고 가문을 나왔던 일이 떠올랐다.

황위 다툼이라고 하지만 피를 나눈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까지 나서서 아들의 견고하고 확실한 황위 계승을 위해 베로니카 황녀를 죽음으로 몰아내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상황에 내가 나서서 그녀를 찾다가 황태자의 미행이라도 붙는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컸다.

나를 바라보는 엘렌의 눈빛이 묘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먼저 그들에게 황태자의 만행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나는 서둘러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황제가 가담했다는 이야기와 금기의 제물로 로위나의 영혼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특히나 ‘로위나’에 관한 이야기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에 있는 사람이 사실 로위나가 아니라, 로위나의 탈을 쓴 인간이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별로 내가 보고 싶은 표정은 아닐 거란 확신만 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 들은 것이냐.”

황태자가 쫓고 있지만, 대외적으론 엘렌은 쓰러진 상태였기에 그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듣는 내내 이를 꽉 다물며 침묵하던 아버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 들었어요.”

“뭐? 언제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고성을 질렀다. 어머니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로위나, 잠은 잔 거니?”

“잤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얀 거짓말을 한 채 일어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가 어머니의 말에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겉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말거라.”

그는 그리 툭 내던지듯 말하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미간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다.

“눈 밑 그림자가 조금만 내려오면 입술에 닿을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 문제 때문에 하나도 잠을 못 잤어요. 제가 원래 한 가지 문제에 몰입하면 잠을 쉽게 못 자는 거 아시잖아요.”

이 또한 거짓말이긴 매한가지였다. 가문에 돌아온 일과 엘렌의 기습적인 행동에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서 밤을 새운 거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울 수 없다.”

“왜요?!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들으셨잖아요!”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황녀께서 하신 말씀을 온전히 다 믿으라고 하는 것이냐. 심지어 무단으로 탈옥을 한 반역자의 말이다. 황태자 전하를 음해하려면 어떤 이야기든 못 하겠느냐?”

“아버지는 황녀 전하께서 반역을 저질렀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

아버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황녀가 황태자에게 모함을 당해 반역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도 그는 묵인하고 가만히 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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