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98화 (99/124)

98화

밤하늘을 닮은 칠흑 같은 검은 머리와 깊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리카르도 에르도안.

그는 황태자인 안셀모 다음으로 두 번째로 계승권을 가진 이였다.

아마도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모든 이들은 리카르도 에르도안이 황제가 되리라 예측할 것이다.

책 속에서도 그는 설인의 반란을 막아, 본의 아니게 안셀모의 황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기실 설인을 막는 데 있어서 고대 마도구를 사용한 아일라의 공이 컸지만, 그녀는 리카르도의 아내에 불과했기에 모든 공은 에르도안 가문의 앞, 즉, 리카르도의 앞으로 돌려졌다.

황태자가 아닌, 리카르도가 황위에 오르는 클로비스 제국.

생소하긴 하지만, 그렇게 상상이 안 되는 조합은 아니었다.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것이라면, 황태자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베로니카 황녀가 아닌, 회귀 전 직접 황위에 영향을 끼치던 리카르도를 경계하고 반역죄로 몰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는 황녀를 반역으로 몰았을까?

심지어 황태자의 단독 소행이 아닌, 황제가 배후로 있던 일이다.

그러면 베로니카 황녀가 리카르도 이상으로 황태자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밖에 이유가 도출되지 않았다.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로니카 황녀는… 원작에서 조용히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갔었는데.’

그랬던 그녀가 돌연 황태자가 황위를 오르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얘기가 되었다.

황녀가 황위에 도전하는 일이 원작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생겼다고 치부하며 넘어갈,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이건 베로니카 황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뒤바뀐 것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지.”

엘렌이 내 생각을 읽고 있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느새 내 옆에 앉아 내가 읽던 책들을 읽고 있었다.

다른 가능성이라면.

딱 한 가지 가능성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황녀도 황태자와 같이 시간을 거슬러 온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

“……대체 시간이 돌려진 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야.”

“황족들. 정확히는 황실의 피가 흐르는 사람.”

황실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황제, 황태자, 황녀 그리고…….

“그럼 리카르도도?”

책을 넘기던 엘렌의 손짓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진짜? 리카르도도 되돌아온 거야?”

황녀가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것도 의외인데, 리카르도가 그랬다는 건 더 뜻밖의 일이었다. 엘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그의 부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카르도도 황제의 조카인데 왜 그럴까.”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만 시간을 거슬러 왔어.”

“네 능력이라면 통찰?”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땐 네가 리카르도의 속마음을 못 읽는다고 했었잖아.”

리카르도가 백작저로 방문하던 날, 기어코 자신이 남편 대역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엘렌이 리카르도를 만났던 일이 있었다.

리카르도 앞에서 엘렌이 온갖 이상한 말을 했던 탓에 그날만큼은 그가 한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분명 엘렌은 자신의 능력이 리카르도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어.’

“그랬었나?”

엘렌이 천연덕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에게 미간을 좁히며 다가갔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글쎄.”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 리카르도 얘기만 나오면 왜 그래? 혹시 나 모르는 새에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생긴 거야?”

리카르도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결같이 불쾌한 얼굴을 하는 엘렌을 보면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엘렌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더불어 누가 자신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엘렌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안 좋은 감정을 갖는 걸 눈앞에서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무슨 특정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리카르도는 엘렌을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워낙 무표정한 사람이라 엘렌을 알아도 티가 안 났을 수도 있겠지만.

“로엔도 알지 않아?”

엘렌이 책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에르도안 공작이 어떤 시선으로 널 보았는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걸 내가 그대로 로엔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잖아?”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투가 미묘하게 차가웠다. 그 사실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엘렌이 리카르도를 싫어하는 이유라고?

‘하지만 그건 나와 리카르도 사이의 일이지.’

엘렌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기에 그가 리카르도를 싫어하는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았다.

“이상하잖아. 그때 로엔을 유부녀로 알고 있으면서 호감을 가진다는 게.”

엘렌이 기다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머릿속에 든 의문에 대답했다.

“그 말은 즉, 도덕적인 이유에서 싫어한다?”

“세상의 도리와 이치는 지키고 살아야지.”

엘렌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에 긍정했다. 나는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진짜 살다 살다, 엘렌한테 이런 소리까지 듣는구나.

이것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물론 엘렌이 진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일로 리카르도를 싫어할 가능성은 만무했다. 리카르도를 싫어하게 된 다른 일이 있었겠지.

딱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이대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로엔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엘렌이 다시 화제를 돌려놓았다.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리카르도를 떠올렸다.

“좋은 분이야.”

“그뿐?”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는 듯해서 답답한 기분마저 느꼈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사업 파트너.’

일전에 리카르도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나는 그에 반응할 수 없었다.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상황이 너무 급변했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감정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없었던 걸까, 기회를 만들지 않았던 걸까.

아마 두 개 중 하나를 꼽는다면 후자에 가깝겠지.

그렇지만 지금도 리카르도는 좋은 동료라고 생각하고, 여기서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엘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가 흡족한 듯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외려 궁금한 건 이 질문을 하는 엘렌의 속내였다.

나는 엘렌처럼 통찰 능력도 있지 않았고, 그는 표정으로 속내를 잘 감추는 부류였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뭘까.

“궁금해?”

엘렌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만족스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평소보다 더 밝은 미소에 괜히 꺼림칙했다. 또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걸까 싶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섭섭하네.”

“본론으로 돌아가자. 넌 아일라의 생각은 읽을 수 있어?”

“응, 왜? 레니에 영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고 올까?”

갑자기 전환된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표정이 시큰둥하게 변했지만 나는 허가 찔린 사람처럼 행동을 멈추었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자고 꺼낸 말이 아니야. 아까 네가 했던 말에 따르면… 아일라도 시간이 돌려졌다는 걸 모른다는 거야? 네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람만 시간의 역행을 기억한다고 말했으니까.”

“응.”

“하지만 아일라는 한 번 회귀를 겪었는데…….”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일라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황녀가 회귀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원작에 따라 단 한 번, 시간이 돌아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게 어쩌면 착각일 수 있다.

한 차례 원작에 의해 시간이 돌려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미 그들만의 엔딩을 맞이했고, 그때 다시 세계의 시간이 되돌려졌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그럼 시간이 두 번 돌려졌다는 이야기인가?

“설마… 이거야?”

“로엔은 똑똑하다니까.”

“왜 이걸 나한테 말 안 했어?”

“이제 곧 말하려고 했었지.”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나는 어이없는 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로엔, 한동안 수도로 올라오지 말고 공작령에 있는 건 어떻게 생각해?”

“무슨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하는데? 슬슬 화나려고 하니까 솔직히 말해줘.”

“…….”

“당사자 없이 일을 해결하는 게 능사는 아니야. 특히나 이런 일엔.”

침묵하던 엘렌이 한 차례 한숨을 내뱉곤,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로위나 카시어스의 영혼을 제물로 시간을 돌렸어.”

“뭐……?”

“원래 황족이 쓰는 금기 중 시간을 돌리는 마법은 영혼 하나가 무작위로 제물이 되거든. 그 결과 로위나 카시어스의 영혼이 운 나쁘게 그 제물이 되어 증발했고. 그 몸은 영혼이 없고 인형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어떠한 이유인지 다른 세계에 있던 사람이 들어오게 된 거야. 그것도 우리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잠깐만. 그게 바로 나라는 얘기야?”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