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당황스러워 순간 잊어버린, 익숙한 사실이 떠올랐다.
‘듣고 있는 거 아니야?’
엘렌은 굳이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만약 내 마음을 읽고 있다면…….
‘그럼 죽여버려야지.’
한기가 도는 시선으로 고개를 쓱 돌려 엘렌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내 쪽에서 등을 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진짜 자고 있는 건지, 자는 척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왜 잠은 내 방에서 자는 거람.’
김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한숨을 옅게 내뱉은 나는 방을 나왔다. 어차피 머릿속이 뒤숭숭해서 잠도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엘렌과 같은 침대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바로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잔단 말인가.
아까 가까스로 식혔던 뺨이 다시 뜨거워졌다.
서재에 도착한 나는 노크를 했다. 지금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이 안에 누가 없길 바랐는데, 다행히 안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재로 들어온 나는 서재 책상에 있는 노트 한 권을 들고 아까 엘렌에게 들은 이야기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조합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제, 안셀모. 황녀 베로니카. 그리고 엘렌.
엘렌…….
‘여기였나?’
아까 그의 입술이 닿았던 왼쪽 뺨에 손바닥을 올렸다.
나는 노트를 덮고,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멈추었다.
‘동부의 문화와 삶의 방식.’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외국에선 고맙다는 인사를 이렇게 하던데.
엘렌의 장난스러운 미소와 간지럽히는 듯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여간 말하는 거나 행동만 보면 바람둥이와 다를 게 없다니까.
방금 하던 짓을 생각하면 어디서 여자나 홀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엘렌처럼 상대의 기억이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었기에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나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나는 뚱한 시선으로 방금 찾아낸 책 한 권을 뽑고 다시 서재를 훑기 시작했다.
‘벨스 왕국의 예절과 문화.’
‘에레스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습관.’
‘델리아 왕국의 비밀스러운 문화생활.’
비밀스러운 문화는 또 뭐람.
나도 모르게 그 책들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새 책장에서 뽑은 책들이 내 품에 한가득 쌓였다.
온통 외국 문화에 관한 책들이었다.
“없기만 해봐라.”
어느 외국에서 고맙다는 인사를 볼 뽀뽀로 한단 말인가.
계속 신경이 쓰여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사춘기도 아니고.’
가벼운 접촉에 왜 이리 신경을 쓰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렸을 땐 종종 엘렌이랑 손을 잡고 다니기도 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가끔은 마법으로 어딜 이동할 때 그의 손을 잡기도 했고.
사소한 접촉일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애써 생각을 돌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를 마저 정리하고 자구책을 떠올리고 있어야 했다.
한번 자객을 보낸 황태자가 재차 내 목숨을 노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은 그리 말하는데 다시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 * *
창밖의 하늘에서 동이 트는지도 모르고, 서재에 앉아 독서에 빠졌다.
어제 목숨을 위협받던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한가롭고 여유로운 감이 있다는 건 자각했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괜히 어제 일만 떠올리며 불안감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로엔.”
“으악!”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쾅, 뒤로 넘어가면서 요란스러운 소음을 만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엘렌이 방금 자다 일어난 얼굴로 빙긋 웃고 있었다. 한가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니 괜히 열 받아 씩씩거렸다.
누구는 자객인 줄 알았는데!
“자객은 걱정하지 마. 로엔한테 다시 보호 마법을 걸어뒀거든. 누가 와도 널 해치진 못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는 건?”
“이런, 심장병은 의사한테 가야 할걸.”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엘렌을 보며 진지한 대화는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세워진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아침부터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인기척도 없이 언제 내 뒤에 다가온 거지?
가까스로 진정이 되었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벌렁거렸다.
엘렌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로엔이 안 보여서 찾으러 다녔지.”
“나한테 용건 있어?”
“아니?”
“용건도 없는데 그 졸린 눈을 하고 나를 찾으러 다녔단 말이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질문만 했다.
“근데 뭐 해?”
그의 시선이 책상에 닿았다.
“책 읽고 있었어.”
기지개를 펴는 척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비틀어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몸으로 쓱 가렸다.
“외국 여행 가려고?”
망할. 역시 엘렌에게 무엇을 숨기길 시도하는 행위만큼 부질없는 건 없었다. 어제 엘렌이 외국인들의 인사법이라며 볼에 키스를 했던 것이 생각나 읽기 시작한 책들이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죽어도 말 못 해. 다시 양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행?’
엘렌이 던진 질문을 조용히 곱씹었다.
듣고 보니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전생에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여행을 가본 적은 없었다.
잦은 철야에 시간을 내지 못했고, 주말엔 평일에 밀린 잠을 자느라 외출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응, 여태까지 일만 했으니 이번 일이 잘 마무리가 되면 조금만 쉴 생각이야.”
엘렌의 물음에 즉흥적으로 결정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물었다.
“누구랑?”
“그건 아직 못 정했어.”
방금 정해진 일정이라, 아직 세부적인 건 정해진 바가 없었다. 정말 여행을 가게 된다면 혼자 가게 되지 않을까.
여자 혼자 여행을 가려면 호위 기사는 한두 명 정도 대동해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얼굴이 따가워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두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쳐다봐? 얼굴 닳아.”
“로엔,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엘렌이 빙긋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볍게 대답해줘.”
역시 할 말이 있어서 그렇게 쳐다보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손을 저었다.
“알겠으니까 궁금한 게 뭔데?”
얼마나 시답지 않은 말을 하려고 저렇게 간을 보는 거람.
“로엔은 누굴 제위로 올리고 싶어?”
“뭐……?”
내가 지금 질문을 잘못 들은 건가. 그의 질문에 잠시 헛것을 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누굴 제위로 올리고 싶냐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질문을 한 사람치곤 너무나도 여상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간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누굴 제위로 올릴 입장은 아니니까 어폐가 있는 질문 같은데…….”
말하면서도 불안함이 엄습했다.
장난으로 이런 질문을 한 거라면 다행이지만…….
‘누가 이런 질문을 장난으로 해.’
하지만 일반적인 사고에서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엘렌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깊이 생각하지 말고, 황제로 그리는 사람이 누군데?”
질문하는 그의 분위기가 유독 집요하게 느껴졌다. 한사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눈빛이었다. 왜 이런 질문에 대답을 집착하는 걸까?
오히려 되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들으면 더 피곤해질 듯하여 대충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게…….”
대충 대답하겠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말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었다. 당연히 이 세계에서 다음 황제는 황태자인 안셀모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원작에서도 현실에서도 황태자는 안셀모였고, 차기 황제로 유력했으니까.
나를 제외한 귀족들은 책의 원작 내용을 모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냥 반전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이 사람이 황제가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사람?”
‘가볍게 말하라고 했으니까.’
회귀 전에도 결국 황제는 안셀모가 되었으니, 이번 생엔 한 번쯤 다른 사람으로 황제를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행적으로 안셀모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 황제로서 그의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뛰어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대처도 그리 좋지 못했다.
……그 일이 일어나면 내가 제국에 사둔 땅값도 내려가겠지?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졌다. 내 금쪽같은 땅들이 똥값이 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설인을 막아 제국의 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즉위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면 엘렌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볼지 뻔했기에 그 부분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내가 누굴 제위로 올리고 싶다고 말한다고 한들 말이 씨가 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만약 안셀모가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황제가 될까. 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