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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96화 (97/124)

96화

“그곳으로 갔다니까 더 신경이 쓰이지만, 뭐, 일단 알겠어.”

지금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내심 영혼이 소멸되는, 극단적인 전개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내가 누굴 생각할 입장은 아니었다. 저 세계에 있는 내 몸은 죽은 줄 알았는데, 잦은 철야를 견디고 살아 있었다는 건 의외였다. 이미 저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몸이 튼튼했던 건가?

“돌아가고 싶어?”

엘렌이 물었다.

“딱히. 일만 치여서 살아서 지긋하거든.”

수긍이 안 된다는 듯 엘렌의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을 훑었다.

“지금이랑 다를 게 없는데?”

“나를 위해서 돈을 버는 거랑 남을 위해서 돈을 버는 거랑은 천지차이야.”

이미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황태자가 아일라와 같이 회귀를 했다면, 내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면 왜 그가 나한테 관심을 가졌는지 이해가 돼.”

가문에서 후계자로 있었을 적, 황궁에서 연회 초대장이 내 앞으로 많이 날아왔지만, 후계 수업과 집무를 보느라 참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가문을 나오기 전에 황태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 나는 모든 이야기를 토대로 나름대로 추측했다.

“나 또한 회귀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황태자는 나에게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책에 적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회귀했다면 나에게 굳이 책을 적으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단순히 내가 회귀했다는 확신을 얻어내기 위한 행위였을까?

아니면…….

‘예언자.’

황태자가 놀란 듯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게 말이지……. 난 놀랍게도 아무 생각이 없어.”

엘렌이 씨익 웃으며 내 침대에 드러누웠다. 말도 없이 내 방 침대에 누운 그를 툭툭 건드렸다.

“야, 네 방 가서 누워.”

“보시다시피 분리 불안 장애를 앓고 있어서.”

“그러면 병원을 가야지. 왜 여기 있어.”

“병원은 무서운데.”

자신이 정말 어린애라도 되는 양 천연스럽게 말하는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큰 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더 이상 나한테 숨기지 말고 말해.”

“그럼 여기서 질문.”

그는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며 손장난을 하듯 검지손가락을 까닥였다.

“로엔을 회귀자라고 알고 있다면, 황태자가 로엔에게 접근해서 얻는 이익은 뭘까요?”

건방진 태도에 재수가 없었지만, 말이 길어지는 게 싫어 그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거야…….”

없다.

없어서 나 또한 아까 같은 고민을 했던 것이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고 정보력도 뒤떨어지는 듯해 막막함이 느껴졌다. 길게 한숨을 쉬고 있자 엘렌이 내 쪽으로 돌아누워 나를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시간을 돌렸을 수도 있어. 아직은 추측….”

“뭐?!”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가? 대체 왜? 아니, 어떤 수로?”

“이유는 로엔도 알고 있어.”

“내가? 설마….”

……설인.

그 일이 벌어졌을 당시엔 이미 황태자는 황위에 올랐을 때였다. 그가 시간을 돌린 게 사실이라면, 다른 사적인 이유가 없는 이상 설인의 반란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황태자가 나에게 건 마법은 정확히 초대 황제가 설인을 봉인했을 때 걸었던 마법이었어. 그건 로엔의 말대로 고대 마도구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지. 그러면 그걸 어떻게 찾았을까?”

왜 진작 황태자가 회귀를 한 사람이란 것을 추측해내지 못했을까.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날 예언자라고 한 이유는 혹시 뭔지 알아?”

“눈속임이야.”

“눈속임……?”

“로엔, 네가 황태자가 회귀했다는 가정을 내리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원래의 너라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예언자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는 말이야?”

온몸에 소름이 싹 돋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예언자가 아니라 빙의를 한 거니까.”

“난 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한 말과 달리 속은 답답했다. 큰 줄기는 대충 의문이 풀렸지만, 자잘한 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설인 때문에 시간을 돌린 거라면, 왜 황태자는 황녀를 없애려고 했단 말인가.

“내가 왜 황녀를 데려갔는지는 안 궁금해?”

“궁금하면 대답해 줄 거야?”

“왜 궁금한지 이유를 들어보고 결정할게.”

엘렌이 새초롬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연두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가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키니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님의 안위가 걱정돼.”

이로써 황태자가 아일라 대신 황녀를 감옥에 넣은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여전히 그녀가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가끔 아일라가 사는 곳에 가면, 그녀도 황녀가 걱정되는지 황녀의 안부를 묻고는 했다.

황태자가 황녀를 감옥에 넣은 것은 죽일 작정으로 넣은 것이다. 그런데 황녀가 지금 감옥 밖으로 나왔으니 황태자가 그걸 두고만 보고 있을 리는 없었고, 오늘처럼 나에게 살수를 보낼 수도 있었다. 엘렌이 대꾸했다.

“내 안위는?”

“알아서 챙기겠지.”

걱정해봤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등장하면서.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엘렌을 흘겨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지만, 뻔뻔하게만 보였다.

“로위나.”

엘렌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 난 퉁명스레 “왜.” 하고 대답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황태자가 누구부터 찾아갈 거라 생각해?”

그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한 나는 조금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개인적으로 나한테만 말해줄 수도 있잖아.”

“로엔은 거짓말에 서투르니까 내 쪽에서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나 거짓말 잘하거든.”

말하고 나서 방금 내뱉은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피식 웃던 엘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레니에 영애를 시한부로 만들었더라. 족히 10년은 거뜬히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 건강한 성인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

“…….”

“대책 없지?”

그에 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나 거짓말 못 해. 됐어?”

빠른 수긍에 웃음을 터트리던 엘렌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로엔, 난 널 제외하고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

“마탑에 있는 사람들은? 넌 마탑주잖아.”

“원래 마법사들끼리 서로 증오하거든. 동족 혐오야.”

“그래?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마탑에 갔을 때 화기애애하던 마법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마법사들한텐 마탑이 직장이자, 사회생활 중 일부일 테니 속으로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알겠어. 오해해서 미안.”

늘 그렇듯이 제멋대로 다니느라 나를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내심 서운했고, 밤잠을 설칠 만큼 걱정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니. 내 생각을 뻔히 알고 있을 엘렌에게 미안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사과가 아니야.”

“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말보다는…….”

“말보다는?”

“잠깐, 이리 가까이 와 봐.”

엘렌이 귓속말로 하겠다는 듯이 손을 입가에 두며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거리가 완전히 좁아진 뒤, 나는 그의 얼굴 쪽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은밀하게 들어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엘렌이 내 얼굴로 점점 가까이 왔다. 엘렌의 눈동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웠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나는 멍한 얼굴로 그를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너, 너. 뭐 한 거야?”

“외국에선 고맙다는 인사를 이렇게 하던데.”

엘렌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 그래?”

나도 모르게 얼빠진 말투가 튀어 나와버렸다. 얼굴은 여전히 불쏘시개처럼 화끈거렸다.

“그런 인사법 들은 적 없거든?”

“그래? 유감이네. 그러면 잘자.”

“야, 네, 네 방 가서 자라니까!”

지금은 왠지 엘렌의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그가 얼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주길 간절히 바랐다.

엘렌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이불까지 덮으며 몸을 깊숙이 묻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분리 불안 장애가 있잖아. 예전엔 로엔의 방에서 자주 잤었는데 그때 로엔이 잠꼬대가 심해서 발로 많이 차였었지.”

“내, 내가 언제 발로 찼다고 그래.”

“같이 잘 때마다 그랬는데?”

옛날에 있던 일에 관한 말을 꺼냈을 뿐이건만 묘하게 낯부끄러워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엘렌을 등진 채 책상 앞에 앉았다.

“로엔은 안 졸려?”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신경 꺼.”

다소 쌀쌀맞게 대꾸한 것과 달리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까의 일로 화가 나야 정상인데 왜인지 화가 나질 않았다.

‘진정하자. 오필리아. 아니, 로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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