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챙그랑!
그의 사과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나는 찻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차가 테이블에 흘러넘친다는 사실조차 조금 늦게 인지했다.
그간 아버지와 생활하면서 그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답은 ‘아니오.’였다. 황제 말고 그가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어머니도 그의 사과를 예상하지 못한 듯 나와 같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사과를 끝으로 고집 센 시선을 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목이 마르는지 그는 침을 한번 삼키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찻잔을 집어 드는 모양새가 처음 차를 마시는 사람처럼 서툴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그에게도 나에게 건넨 사과가 쉬운 일은 아니었음을 방증했다.
나는 그의 사과에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에 관해 여쭙고 싶어요.”
“……어떤 걸 묻고 싶다는 거니?”
어머니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라는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5년 전, 겨울이다.”
아버지는 확실히 시점을 알고 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5년 전, 겨울이라면 내가 마르그리트 백작이라는 작위를 돈으로 샀을 때와 시기가 일치했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게 되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계셨어요?”
“…….”
그는 다시 굳게 입을 닫았다. 불안한 눈길로 보고 있던 어머니가 그 대신 입을 열었다.
“로위나, 우리는 네가 억지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
“네 성격에 그걸 밝히고 가문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어떤 수로든 다시 나갈 궁리를 세우지 않았겠느냐?”
그녀의 말에 이어 아버지가 말했다. 다소 쌀쌀맞고 냉랭한 그의 말투에 어머니가 눈썹을 치켜들며 아버지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본 체도 하지 않으며 나를 꼿꼿하게 보았다.
‘그렇긴 하지.’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본인의 찻잔에 있는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로위나, 네가 글자를 익힐 때부터 후계를 잇는 일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한순간에 뺏어버렸어……. 그런 우리가 너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단다.”
어머니가 타이르듯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조곤조곤한 말로 사람들을 재단하던 그녀에게, 자신의 말이 뭐든지 옳다고 여기는 아버지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7년의 세월이 이토록 긴 것이었을까?
아까 내가 엎지른 차가 테이블을 타고 카펫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나에게 촉각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 쏟아졌네요.”
멍하게 테이블에서 찻물이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나는 테이블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종소리를 들은 하인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나는 엎질러진 찻잔에 눈짓했다.
“찻잔 좀 다시 채워줘.”
“예.”
“…….”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일련의 행동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지켜보았다. 실내의 공기가 없어진 것처럼 숨 막힌 표정을 짓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즐겨 마시던 홍차라 향이 좋아요.”
“……그래, 창고에 가면 찻잎 보관함에 네가 좋아하던 찻잎들이 많단다. 한번 보겠니?”
어머니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얼른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그 창고에 달려가서 보관함을 가져올 것 같은 태세였다. 한참 얼굴을 굳히며 나와 어머니를 보던 아버지가 그제야 내 뜻을 파악했는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봐도 괜찮아요. 그리고…… 방 두 개만 내어주세요.”
돌려서 자고 간다고 하는 내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조금 촉촉하게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 방은 아직 그대로란다. 로위나.”
“…….”
그녀가 한 말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번도 껍데기가 열린 적 없는 조개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이제까지 겪었던 모든 상황이 나를 위한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나에게 저자세로 나오실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오직 후계자로서 살아왔고, 그게 가족들이 나를 보는 가치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오해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 했다.
“저도 오해해서 죄송해요. 두 분께.”
“무슨 오해?”
“그런 게 있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서려고 하자, 아버지가 나를 붙잡았다.
“로위나. 아까는 무슨 일이 있던 게냐.”
“큰 사고가 있었니?”
어머니도 걱정이 물든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 내 옷에 묻은 피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자객이 왔었어요.”
“무슨 말이냐, 그게!”
아버지는 노한 목소리로 분노를 터트렸고, 어머니는 핼쑥한 얼굴로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녀는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제가 이곳에 오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있었나 봐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 올라갔다. 아직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 * *
“너는 알고 있었지?”
“내가 무엇을?”
방에 엘렌을 데려온 나는 그를 붙잡고 물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연덕스럽고 순진한 몸짓 하나하나가 그와 어울려서 더욱 얄미웠다.
“그래서 자꾸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거였지?”
“나는 로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엘렌은 내 어릴 적 애칭을 부르며 대답했다. 워낙 오래되고, 누구도 부르지 않아 나조차 가물가물한 애칭인데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필리아는 애칭이 있는데, 로위나는 애칭이 없으면 섭섭하잖아.”
“됐고, 아버지가 황태자랑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해줘.”
아까의 대화로 엘렌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다 읽었을 터였다.
“황태자가 로엔의 과거를 물어봤어.”
아버지한테 황태자가 나에 관한 걸 물었다고?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내 과거라면, 무슨 과거? 그리고 언제?”
“시기는 로엔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황태자는 카시어스 후계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어. 공작님은 윗전이 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기꺼워하며 이야기를 술술 하셨지.”
“어릴 적 얘기라면 구체적으로 내가 몇 살일 때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전부.”
“…….”
황태자가 왜 나에 관해 집요하게 물었을까. 후계자가 되었을 때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차기 황제가 될 황태자가 카시어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태까지의 일을 종합해보면 허투루 넘길 만한 일이 못 되었다.
“로엔, 원작에 나오는 너의 모습을 떠올려 봐.”
“원작에서의 내 모습?”
“그래, 카시어스 가문의 장녀인데 소설 속에서 언급 한 번 되지 않을 리는 없잖아?”
그의 말에 원작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원작에 등장했었던 적이 있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도 나에 관한 언급은 생각나지 않았다. 소설을 읽을 때 조연의 이야기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주인공들과 엘렌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던 탓이었다.
“원작에서 카시어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는 누구였어?”
“그건 알아. 로디안이었지.”
원작과 지금 상황이 달라진 게 없는 듯하여 조금 씁쓸했다.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같은 결과였을 거라고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만약 원작과 같이 로엔이 카시어스 공작 가문을 나가고 그 후에 로디안이 후계자가 된 거라면, 로엔은 똑같이 허니문을 차렸겠지.”
“그러면…… 아!”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선 리카르도와 아일라의 중매를 서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어. 그러면 원작의 로위나는 후계자 수업조차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그건 나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전제였다. 그래, 나라면.
“이게 뭐야…….”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명쾌하기는커녕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이건 마치…… 내가 사람의 몸을 빼앗아 빙의했다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그럼 진짜 로위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엘렌은 내 속을 읽었는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지옥에 있을걸?”
“지옥?!”
식겁하며 되묻자 엘렌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로엔은 전에 살던 곳을 지옥이라고 말하잖아.”
“아……. 그랬었지. 그러면 네 말은 지금 이 몸에 있던 로위나가 내 몸으로 들어갔다는 말이지?”
말하면서도 입안에 도는 어감이 어색했다. 그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로엔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