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러나 황태자와 황제가 황녀를 역모로 모는 이유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황녀님은 네가 데려간 거지?”
“응.”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엘렌이 기절한 채 납치당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 일은 엘렌의 소행이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지금 그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황궁에서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걸 염두에 두고 변신한 걸 테지.
“황녀 전하를 데리고 가서 뭐 하고 있는데?”
그가 순진한 소년의 탈을 쓴 채 밝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 걱정 없는 듯한 해맑은 미소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정의 실현?”
이토록 엘렌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더욱 수상한 일을 벌인다는 생각만 들었다.
“위험한 일이야?”
엘렌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한번 답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돌릴 수 없다는 걸 그간 경험으로 잘 알았다.
“위험한 일이면 하지 마. 그리고… 앞으로 내 일에 나서지 마.”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엘렌이 휙 소리 나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듯 조금 크게 눈을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당황스러움도 엿보였다. 오히려 그 반응에 당황한 쪽은 나였다. 엘렌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식으로 도와주는 거 전혀 고맙지 않거든.”
“난 오필 도와준 적 없어.”
“그래, 네가 하고 싶어서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럼 나랑 관련된 일엔 손대지 마. 어떤 것이든.”
또 나 때문에 엘렌이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가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진 모습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괜히 아일라의 문제에 그를 끌어들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었다. 나를 지그시 보던 엘렌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지는 몰랐네.”
“알면 다시는 그러지 마.”
“오필이 그렇게 간절하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순진한 아이의 탈을 쓰고서 잔망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내뱉는 말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카시어스 저택에 도착한 나는 마차에 내려와 정문으로 다가갔다.
처음 보는 문지기가 나를 향해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수상한 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 기분 나빴지만, 누가 봐도 새벽에 기별도 없이 찾아온 사람 쪽이 이상했다.
“부모님을 뵈러 왔어요.”
“예?”
문지기는 왜 너네 부모님을 여기서 찾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엘렌을 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 지었다.
“구걸하려거든 다른 수단을 취해보시오.”
문지기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내 모습이 지금 어떻다고 저러는 거람? 시선을 내려 내 차림새를 다시 보았다.
“아.”
옷이 완전히 피범벅이었다. 내가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까 마부가 내 앞으로 쓰러지면서 피가 많이 묻었던 탓이었다.
“여기에 카시어스 공작 각하께서 산다는 얘기를 듣고 갖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이렇게 빤히 보이는 수작으로 날 속이고 들어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할 말을 잃은 나를 보고 완전히 동냥아치로 판단했는지 문지기의 태도가 금방 거만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살다 살다 거지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다. 엘렌은 그게 재밌는지 웃음을 빵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문지기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애까지 데리고 동냥이라니. 이 추운 날씨에 애가 불쌍하지도 않소?”
나는 흘긋 엘렌을 보았다.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얘기했으나, 그는 우리 부모님을 보고 싶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따라왔다. 오히려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이 더 불안할 지경이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척 그와 함께 정문 앞으로 왔다.
“전혀 안 불쌍한데요.”
“매정한 어미구만. 심지어 좋은 옷은 그쪽이 입고, 애는 누더기를 입혔군.”
끌끌 혀를 차며 나를 보는 시선은 천하의 몹쓸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화가 나기는커녕 터무니없는 오해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이 상황을 어쩐다.’
쉽사리 저택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집 딸이라고 말하면 동냥아치가 아니라 미친 사람으로 보겠지.
그렇다고 하염없이 공작 부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내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례는 하겠습니다.”
나는 가방에 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보였다. 혹시 몰라서 많은 돈을 챙겨왔었다. 지갑에 든 돈을 본 문지기의 눈은 휘둥그레하게 변했다.
“잠깐이면 돼요. 혹시 헤이든 씨를 만날 수는 있을까요?”
큰 액수에 혹한 얼굴을 하던 문지기는 헤이든이라는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헤이든 보좌관님을 아십니까?”
말투가 공손해졌다. 나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요, 싫다는 말인가요?”
돈이 통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빤히 내 속마음을 읽고 있을 엘렌에게 빙긋 미소를 던졌다. 뭐, 저 태도론 무력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 * *
사람들이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이라, 저택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7년이 지났는데 공작령에 있는 공작 성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 궁금증은 작은 불씨처럼 피어올랐다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누구십니까?”
문지기의 부름을 받은 헤이든은 안경을 고쳐 쓰며 졸린 얼굴로 나왔다.
“자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문지기가 헤이든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기는 쉬웠다.
“오랜만이에요, 헤이든.”
“저를 아는 사람입니까?”
“알다마다요. 매일 같이 일한 사이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지금 혼자 일하고 있는, 서. 설마.”
헤이든의 작은 눈이 점점 커졌다. 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전등을 가져와 내 앞에 둔 그가 경악했다.
“아, 아가씨!”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 20년 넘게 일한 사람이라 내 목소리를 듣고, 금방 알아차린 듯했다.
나를 알아보고 멍한 얼굴을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헤이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 얼굴이 아닌, 아래쪽을 보며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얼굴이 희멀겋게 변한 채 경악하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시선을 내려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이거 내 피 아니에요. 헤이든.”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그에게 나는 급히 손을 저었다. 하지만 이미 헤이든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수차례 내 피가 아닌, 마부의 피라고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자, 그제야 그는 뒤늦게 마부를 치료할 의사를 불렀다.
어차피 엘렌이 치료를 끝낸 뒤라 더 치료할 부분은 없겠지만, 엘렌의 존재를 밝힐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안에 소등되어 있던 전등들이 켜지면서 한낮처럼 환해졌다.
그제야 어두웠던 저택 안이 환히 보여서 나는 고개를 돌려가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이제 곧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게 되겠지. 아버지에게 황태자한테 부탁한 것이 뭔지 물으려고 왔지만, 그 이야기로 끝날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속에 무언가가 낀 것처럼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엘렌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탈을 쓴 채 졸린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저 홀로 태평한 것이 지금만큼 부러울 때가 없었다.
“서, 설마…… 로위나?”
위쪽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2층을 바라보니 어머니와 그녀의 뒤에 선 아버지가 보였다. 둘 다 굳어서 입을 벌린 채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
그들과 눈이 마주친 나는 모호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이 순간만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연회장에서 보았으나,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누구보다도 고고한 귀족처럼 살리라 생각했던 분들의 얼굴에서 고통 어린 번민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혹여나 나와 관련된 일이었을까 봐,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보던 그들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왔다. 두 분 다 자다가 급하게 나온 것처럼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로, 로위나… 정말 네가 맞니?”
어머니가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뻗으며 내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떨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