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 감사합니다.”
마부는 마차 안에 동석을 한 채 나와 엘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엘렌의 치료로 완전히 몸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방금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한테 마차를 이끌라고 할 수는 없었고, 마차를 끌던 말들도 암살자에 의해 다 죽은 상태였다. 마차는 엘렌의 마법을 동력으로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저는 이제 완전히 괜찮습니다. 마님.”
“괜찮다는데?”
엘렌은 마부가 마차 안에 같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아까부터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저 아이는 무시하고 그냥 쉬어.”
“하지만…….”
자꾸만 엘렌의 눈치를 보는 마부에게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 엘렌의 행색은 귀한 집 도련님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작은 소년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다 큰 성인 남자가 꼬마에게 절절매고 있는 모습이라니. 기가 바짝 죽어 있는 것이 참 이상했다.
그리고 왜 엘렌은 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혹시 본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상황인 걸까?’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자 엘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되었다. 이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가 누군가 그를 쫓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면?
“오필은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엘렌은 웃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한층 차갑고 스산해졌다. 맑은 연둣빛 눈동자는 흉흉한 빛으로 어둡게 침잠했다. 그의 살기 짙은 눈빛에 마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어린 소년이 백작 부인에게 반말하는 작태가 기묘한지 나와 엘렌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엘…… 아니, 알렉스. 인상 좀 펴.”
나는 대각선에 앉아 있는 마부를 흘끗 보고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엘렌은 픽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필은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모아둔 돈을 다 못 쓰고 죽으면 아깝긴 해.”
그래도 전생처럼 과로로 갑자기 죽을까 봐 유산 상속자를 정해두긴 했다. 내가 피땀 흘려서 키운 사업까지 몽땅.
이쯤 되면 상속자는 고마워서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도 안 고마운데.”
감동의 눈물은 고사하고, 쌀쌀맞은 대답만 돌아왔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대답이 돌아오리라 예상했건만, 생각 외로 반응이 차가웠다.
“왜? 혹시 금액이 부족해? 아니면 세속적인 문물은 취향이 아닌가?”
냉담한 내 상속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아니야.”
감았던 눈을 뜬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필은 내가 유산 상속자로 ‘오필리아’라고 지정하면 고마울 것 같아?”
“너 땡전 한 푼도 없잖아.”
상속할 재산도 없는 애한테 무슨 유산 상속을 받는담.
내 지적에 엘렌이 약간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이아몬드 광맥을 갖고 있다는 전제라면?”
“너무 고맙지.”
엘렌은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그의 표정에 나는 몹쓸 인간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와 같이 인상을 구겼다.
“왜, 왜.”
“오필은 내가 죽는다는데 안 슬퍼?”
“슬프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오필만큼 무정하고 매정한 사람은 없을 거야.”
아아, 그렇구나. 그답지 않게 감성적인 말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부인께서 들으셨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을 텐데.”
부인이라 하면, 알렉산드로 대공 부인을 이르는 말이었다. 늘 사람 같지 않은 말을 턱턱 내뱉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고심하고 심란해하던 대공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이야기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누가 누굴 보고 무정하고 매정하다는 건지. 웃기지도 않았다.
“엘, 아니, 알렉스.”
내 부름을 들었음에도 엘렌은 눈을 감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토라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젠 정확히 어떤 일이 있던 건지 말해줘. 네 지금 몸 상태는 어떤지부터.”
대놓고 황태자한테 당한 건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부의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에 바늘이 찔린 정도야.”
그가 상황에 맞지 않는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저주 마법의 영향이 미미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황태자가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몰라도, 대마법사인 엘렌을 상대로 예사로운 마법을 걸었을 리는 없었다.
그는 설인에게 걸었던 마법을 똑같이 엘렌에게 걸었다고 했었지.
그런 그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화가 났다. 깨어 있었다면 살짝 언질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은가. 토라질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뚱한 얼굴로 엘렌에서 시선을 떼고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숲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닦인 길로 들어섰다. 이제 곧 수도에 있는 카시어스 공작 가문의 사택이 나올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쪽은 엘렌이었다.
“내가 보고 싶었어?”
“응.”
내가 창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렌이 흠칫 몸을 굳혔다. 빠른 긍정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상대방 마음도 쉽게 알면서 새삼스럽게 왜 놀라고 그래.”
마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엘렌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지.”
엘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과 다르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히 그 변화가 마음에 걸려 나는 내가 방금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런 나를 보던 엘렌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나 좋을 대로 착각이나 오해를 할 수 없어.”
“좋은 거 아니야?”
“별로.”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의 말씨에 나는 머쓱하게 ‘아, 그래.’ 하고 답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장점만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본인 좋을 대로 착각하거나 오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어떻게 오해하고 싶은 건데? 말해봐. 나에 관한 일이야?”
모호한 그의 말에 질문했으나, 그의 입이 선뜻 열리지는 않았다. 엘렌이 머뭇거리는 것을 처음 보는 나로선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일이었다.
“대체 하고 싶은 오해가 뭔데 그래?”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의 귓가가 붉어지는 것을 보니 왠지 알고 싶어졌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엘렌이 입을 열었다. 대놓고 말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의아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엘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저번처럼 말도 없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상황은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사람 일은 몰랐기에 지금 듣고 싶었다.
어느새 마부는 잠들어 있었다. 대각선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부가 마음에 걸렸는데, 잠이 들었다니 다행이지만 이상했다.
죽을 뻔했던 사람이 저리 쉽게 잠이 든다고?
혹시 자는 척하고 있는 건가?
“아니, 자고 있어.”
엘렌이 내 의문을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그의 말이라면 마부가 잠든 건 사실일 것이다. 아까만 해도 연신 이쪽을 보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잠이 들었다니 신기한 사람이었다. 완전히 깊숙이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
내가 엘렌을 바라보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엘렌다운 일 처리였다.
내내 마부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한결 편한 마음으로 엘렌에게 물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해줘.”
“오필이 어느 정도 짐작하는 대로야.”
그는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황제의 음독에 의심을 품은 엘렌이 황태자의 주변 사람에게 접근했지만, 누군가가 처음 보는 마법으로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저주를 해독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려서 일어나보니 시간이 일주일 정도 흘러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주 마법에 특화된 엘렌이 처음 접하는 마법이라면 고대 마법일 확률이 높았다. 갑자기 불현듯 원작의 일부가 생각났다. 원작에선 아일라가 고대 마도구로 설인을 같은 방식으로 봉인했었지.
‘황태자는 어떻게 그 마법을 걸 수 있었지……?’
설마 그 또한 같은 마도구를 찾아낸 걸까?
고대 마법은 고대 시대의 마도구가 없는 이상 흉내 낼 수 없어서 설인의 반란 때 제국이 큰 위기에 빠졌었다.
그러면 어떻게 찾아낸 거지?
내가 황태자에게 준 책에 마도구의 위치는 적혀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앞서 책을 주기도 전에 이미 그는 엘렌에게 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는 고대 마도구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마도구로 마법을 썼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였다. 황태자가 아일라와 같이 회귀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기실 정확히 황태자가 이 일을 벌이는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회귀를 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설인의 반란 이후, 황실의 무소불위 권력이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반란을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잠재우고, 그 후 리카르도를 제위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