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알렉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처럼 얼굴을 굳힐 필요 없어요. 별일 아니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역시 속이 답답했다. 알렉스는 알겠다며 마주 앉아 차만 홀짝였다. 그가 ‘차가 참 맛있네요.’라면서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며 어색하게 말을 붙이고 있을 때, 내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예?”
“어디까지나 내 얘기가 아니라, 예시라는 점을 유념해두세요.”
“네!”
여러 번 예시라고 강조하고는 종을 흔들어 리온에게 체스 말을 가져오라 명했다. 알렉스가 그런 나를 보고 의문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갑자기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었는데 체스를 가져오라 했으니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체스판까지 가져온 리온에게 판은 치우라고 했다. 한가하게 체스나 두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리온이 응접실을 나가자 나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재차 아까의 말을 강조했다.
“예시라는 거 꼭 기억해요.”
테이블에 놓은 여러 개의 체스 말 중 비숍을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간 있던 일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 알렉스에게 말했다.
예시를 빙자한 내 이야기를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던 알렉스는 이야기가 끝나자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는 폰을 집어 들고 말했다.
“비유를 하면 체스판에서 하나의 폰이 모든 말들을 물리치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네요. 그러다가 일이 점점 꼬여가고….”
알렉스는 고민의 색이 짙은 얼굴로 손에 있는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말들을 폰의 뒤에 놓기 시작했다.
“체스판에서도 폰이 혼자서 경기를 좌지우지하지 않잖아요. 비숍이나 나이트. 룩들이 움직여야 폰을 지키며 경기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퀸이나 킹이 움직이기도 하고….”
“그 말은 폰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네, 혼자서 일을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 말에 한참 침묵하던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폰이 이 경기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건…….”
알렉스가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당혹스러움을 넘어 낭패감이 섞인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읽은 감정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알렉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나는 조용히 책상에 있는 폰을 집어 들었다.
“하기는 이 경기에서 벗어나기엔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긴 해요.”
“…….”
“조언 고마워요. 알렉스.”
그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와 황태자 사이에 있던 대화를 알아야 했다.
* * *
고요한 새벽에 리아스 숲을 가르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가 시끄럽게 적막을 흐트러뜨렸다.
수도에 있는 마르그리트 백작저에서 카시어스 공작저까진 마차로 빠르면 4시간이었다. 왕복 8시간이 넘는 거리인 만큼 황궁에 출근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빠르게 다녀와야 했다.
창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탓에 창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이 매섭게 뺨을 훑었다. 온통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마부가 있는 쪽에 지팡이를 두들겼다.
“어디까지 왔지?”
“지금 숲 중간까지 왔습니다. 마님.”
“조금 더 속도를 내줘.”
“예!”
마부가 “이랴!” 하며 말이 달리는 것을 재촉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차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숲을 가르며 바퀴가 돌에 차일 때마다 덜컹거려 잠은 자지 못했지만, 눈이라도 감으며 밀려오는 피로를 조금이라도 달래보았다.
“후우…….”
낮엔 산책하거나 피크닉을 하기도 좋은 경치가 좋은 숲이지만 광원이 달만 있는 새벽은 무언가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새벽이라지만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 흔한 들짐승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너무 조용해서 숲 한가운데에 누워 잠을 자도 숙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말의 투레질 소리와 ‘히잉!’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 문을 열려고 다가가는데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마, 마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채 마부가 서 있었다. 핼쑥하게 질린 얼굴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 으악!”
“악!”
그대로 앞으로 무너지는 마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쓰러진 마부의 등 뒤에는 긴 상흔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마차 문 너머로 어떤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달빛에 반사되어 첨예한 빛을 내고 있는 검도 보였다. 괴한은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10명 이상.
“이봐! 저, 정신 차려!”
다행히 마부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빨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금방 죽게 될 것이었다. 본능적인 공포에 입이 덜덜 떨렸다. 마차 밖에 있는 괴한을 바라보았다.
‘왈패나 도적은 아니야.’
보기에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이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무기가 없는지 훑어보았다. 무기라 할 수 있는 건 지갑이 담긴 핸드백 하나였다. 가방조차도 저 암살자가 칼을 한 번 휘두르면 너절해질 것이 분명했다.
도저히 흉기를 들고 있는 괴한을 상대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만약 나에게 검이 있었더라도 저 앞에 있는 암살자를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구의 사주야?”
그거 하나만은 듣고 싶었다.
“…….”
묵묵부답이었다. 짚이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황태자와 레니에 후작 가문.
“황태자인가? 아니면 레니에 가문?”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인지 후작 가문보단 황태자 쪽 사람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황태자는 내가 카시어스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를 협박하면서까지.
암살자는 쓰러진 마부가 거치적거린다는 듯 들것처럼 빼내서 치워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마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차 안에 있는 나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였다.
열심히 벌었던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슬쩍 눈을 뜨니 괴한이 다가와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파앙!
그런데 갑자기 내 주변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정확히는 바로 내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으헉!”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아까 눈앞에 있던 괴한이 저 멀리 날아가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앞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빛무리에 손을 대려다가 흠칫했다. 이게 뭐지?
“설마…….”
이제야 생각났다. 엘렌이 나에게 방어마법을 걸어두었다는 것을.
예전에 마법에 흥미가 있을 때 보았던 마법 서적에선 시전자가 정신을 잃으면 마법이 와해가 된다고 들었다. 이 말인즉 엘렌은 납치된 게 아니라 깨어 있다는 소리였다.
다른 괴한들이 주춤주춤 나를 보며 경계하더니 달려들었다. 그들 중엔 마법을 쓰는 이도 있었다. 화염구가 나에게 날아왔지만, 아까처럼 방어벽 같은 것에 부딪혀 펑펑 터져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바닥에 마법진들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섬뜩한 느낌이었다.
“제길, 피해!”
-파앗!
어떤 괴한이 소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바닥에 있던 마법진들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로 인해 새벽의 숲은 한낮보다 더욱 밝아졌다.
“……뭐야?”
숲 전체를 밝힐 듯 환하게 빛났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눈앞에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넋을 잃고 마차에서 천천히 나왔다.
어두워진 숲은 지독하게 조용했다. 그러나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방금 있던 암살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분명 마법진 때문이야.’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던 암살자들이 이렇게 떠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마법은 여러 명을 한꺼번에 순간 이동시킨 걸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한 명밖에 없었다.
“……엘렌?”
“죽기 직전에도 돈에 대한 미련이라니, 오필은 여전하구나.”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숨이 절로 멈추었다. 너무 익숙한 목소리였다.
점점 주먹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아까의 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얼굴에 점차 열이 몰렸다.
“한 대만 때려도 돼?”
“오필은 은혜를 폭력으로 갚는 걸 선호해?”
“응. 내 방식이야.”
퉁명스레 대꾸하며 뒤를 돌자,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엘렌이 보였다. 연둣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이 놀랍도록 식어갔다. 나는 김빠진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엘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