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황녀 전하께서 무슨 수로 탈옥을 했다는 거죠?”
바이올렛을 의무실까지 데려다주고 온 리카르도는 내 물음에 침묵했다. 몰라서 입을 다무는 게 아닌, 짚이는 부분이 있지만 말하기를 조금 껄끄러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황궁의 지하 감옥을 탈출하는 건 평범한 방법으로 불가능했다.
“말해주시기 난감한 사안이라면, 저는 모르는 일로 생각할게요.”
일단 나와 연관된 일이 아니라면, 이런 일에 관해 듣는 것도 지양하는 게 좋았다. 이번 일로 황궁과 얽혀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똑똑히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얽힐 대로 얽혀버린 것 같지만.’
나는 황태자의 손에 넘어간 책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디 그 책이 황녀가 잡혀들어가는 데 일조를 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마법사가 관여한 모양이다.”
“마법사요?”
역시.
황녀의 단독 소행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이긴 했다. 나는 리카르도의 발언에 이상한 불안감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지하 감옥의 험난한 보안을 뚫고, 수감자를 탈옥시킨 마법사라. 꽤 좋은 실력을 갖춘 마법사일 터였다.
‘왜 하필 엘렌이 생각나는 거람.’
주위에 엘렌을 제외하고 아는 마법사라곤 알렉스밖에 없는데 알렉스가 지하 감옥을 뚫을 수 있는 마법사로 보이지는 않았다.
리카르도를 바라보자 그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비껴 나가는 것에 나는 그 불길한 생각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엘렌인가요?”
“아직 확실한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엘렌이 용의 선상에 있긴 하다는 말씀이군요.”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리카르도가 나를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덩달아 혼란스러웠다. 이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듯한 얼굴이었다.
“제가 가담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리카르도는 허가 찔린 듯 얼굴이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 긍정을 읽은 나는 그처럼 얼굴을 굳혔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니. 리카르도가 나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몹시 궁금해졌다.
“전 그 일에 관해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어요.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에요.”
“그런가.”
“정말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착각이었다면 미안하군.”
그가 이유를 설명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일라는 내 직원이라서 구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리고 누명이었으니까.”
“그러면 베로니카는 정말 반역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나?”
“그건 윗전의 일이니 저야 모르는 일이죠.”
말하면서도 가슴께가 꾹꾹 쑤셨다. 황태자는 대체 왜 나한테 책을 써 달라 해놓고는 그다음 날 바로 베로니카를 잡으러 온 거야. 인질 교환이라도 한 것처럼 아일라가 풀리자마자 베로니카가 감옥에 갇혀버렸기에 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 일을 잊어 보려고 해도, 내 탓처럼 느껴져 쉬이 잊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엘렌은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나요?”
“방금 마탑에서 연락이 왔다. 알렉산드로 대공자가 사라졌다고 하는군.”
“네?!”
나는 깜짝 놀라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렌이 사라졌다고?
“나, 납치당한 거 아니에요?”
엘렌의 일이 황태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내 손이 달달 떠는 것을 보던 리카르도의 눈빛이 차갑게 침잠했다. 나는 그걸 보고 엘렌에게 큰일이 생긴 게 아닐지 불안해졌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납치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를…!”
“그 사실이 그리 중요한가?”
싸늘한 그의 말투에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리카르도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 중요해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중요했다.
“공작님도 친한 친구가 혼수상태였다가 사라졌다고 하면, 걱정되지 않으시겠어요?”
“……친구라면 그럴 수 있겠군.”
친구라는 단어가 그를 누그러뜨린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했다.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다른 부분을 걱정해야 할 것 같군. 왜냐하면-.”
“…….”
“지하 감옥에 있는 간수들이 알렉산드로 대공자의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물론 그로 모습을 변환한 다른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겠지. 그래서 그대에게 묻고 싶군. 대공자는 진짜로 정신을 잃은 상태가 맞았나?”
“……제가 알기로는요.”
어제 대공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아들이 쓰러진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설마 엘렌이 곧바로 일어날 걸 알고 그랬던 걸까?
어정쩡한 내 말에 고민하는 얼굴을 하던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갈 듯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공작님.”
리카르도가 내 말에 뒤돌았다. 나를 보는 시선에 나는 입을 달싹였다. 리카르도도 황제가 쓰러진 일들이 자작극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 일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던 걸까?
황제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리카르도가 그걸 알고 묵인할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이미 그는 황녀가 잡혀가는 데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전적이 있었다.
“아니에요.”
“할 말이 많은 얼굴인데.”
리카르도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짝 내 앞으로 다가오자 어디에다가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심연처럼 푸르고 깊은 눈동자는 그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나는 에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저번에 황녀님이 잡혀가셨을 때 말이에요. 왜 보고만 있었나요?”
“그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나를 추궁하는 건가.”
리카르도의 길쭉한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초리에 나는 샐쭉 입술을 실룩였다.
‘추궁당하는 쪽은 나 같은데.’
나는 그 말은 목구멍으로 삼키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리카르도는 잠시간 의미 모를 시선을 교환했다. 나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이야기를 리카르도가 넘겨짚는 것이 짜증이 나서 대답 없이 시선을 마주친 거지만, 리카르도는 그것을 또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한 듯싶었다.
“내가 직접 마셔서 그 독이 진짜라는 것을 밝혔는데, 거기서 황녀가 무죄라는 걸 주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건…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입을 다문 채 고민에 휩싸였다. 나가지 않는 리카르도를 보며 질문은 이게 전부였다고, 말을 했으나 그는 사무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내가 할 말을 더 기다리는 것처럼. 그의 그런 태도에 나 또한 말없이 멀뚱히 있기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공작님은, 폐하께서 그 독을 마시고 쓰러지신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상황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대답이 조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내 착각일까?
나는 그를 조금 더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공작님은….”
말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리며 조사단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품에는 여러 서류 뭉치들이 들려 있었다.
“그게 다 뭐예요?”
“위에서 들여온 사건 자료들입니다. 오늘까지 처리해서 정리하라고….”
“태자 전하의 명이겠군요.”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놈의 황태자는 사람이 쉬는 꼴을 못 보는구나. 나는 그들이 가져온 서류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완전히 잡다하고, 쓸데없는 정보들이었다. 이런 서류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린 황태자의 속내는 확실했다.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서류나 처리하고 있으라는 이야기겠지.
하여간에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 * *
백작저로 퇴근하자, 응접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
“사장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응접실 안에 있는 사람을 물린 나는 알렉스를 붙잡고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엘렌이 사라졌다뇨?”
알렉스는 내 질문에 영 다른 질문으로 반문했다.
“사장님은 마탑주님이 어디 계시는지 모르세요?”
“알았으면 진작 감옥에 넣었죠.”
스산히 웃는 내 얼굴에 알렉스가 움찔거렸다.
“물론 납치가 아니라면요.”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를 속이며 걱정시키곤, 혼자 태평하게 잠만 자다가 사라졌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네….”
“그래서 그걸 물으러 온 거예요?”
알렉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도 안 보이셔서, 혹시 사장님께 간 건 아닐까 싶었어요.”
“하아…….”
아까 리카르도에게 들었던 소식이 떠올랐다. 엘렌이 황녀의 탈옥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외부인인 알렉스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차만 홀짝이며 책상만 반복적으로 두들기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나를 살피던 알렉스가 나에게 질문했다.
“고민…….”
찻잔을 내려놓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해결은 못 해 드리지만, 들어 드릴 수는 있어요.”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