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안셀모를 죽이는 방법.
엘렌을 보는 베로니카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동생이라지만, 그녀가 그를 죽일 생각은 안 했기 때문이다.
친동생을 죽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 전제인가?
그러나 친누나를 죽이려는 일도 벌어질 뻔했다.
옛날엔 형제끼리 죽이며 황위 다툼을 했다고 하지만, 그게 그녀에게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평화에 안주하며 살았던 대가인 걸까? 신에게 묻고 싶었다.
베로니카는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안셀모도 인간이야. 인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죽이면 되지 않아?.”
“아니. 못 죽여. 내가 여러 번 시도해봤거든.”
엘렌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푸른 속눈썹 아래에 드러난 살기는 녹진했다.
“그러면 안셀모는 당신이 이미 깨어 있다는 걸….”
“글쎄, 난 황족의 생각은 읽을 수 없으니.”
혹시나 그가 깨어났다는 일로 로위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가능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황족의 생각은…?’
그의 말끝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조금 미묘하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읽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손을 저어서 하늘에 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뱀이었다.
“시간을 돌린 게 황태자인데 영혼은 그의 것이 아닌 상태지.”
베로니카는 하늘에 그려진 뱀을 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평범한 뱀이 아니었다.
“저건…….”
제국 초기 신화에 나오는 뱀을 닮은 신룡이었다. 용을 닮은 뱀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믿는 제국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 다르게 클로비스 제국은 뱀을 영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뱀은 뱀을 잡아먹기도 하는 동물이었다. 그게 설령 가족이라도.
그래서 어려서부터 베로니카는 뱀이 싫었다.
“안셀모가 왜 이런 짓을?”
그녀는 알았다. 안셀모가 시간을 돌리기 전에도 황위를 물려받던 일이 선연했다. 그런 그가 왜 시간을 돌린단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눈앞에 두고서.
한 가지 짐작 가는 바로는 시간이 돌려지기 전, 설인의 반역으로 제국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다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지 알아?”
“나는 모르지.”
엘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행동이지만 퍽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베로니카는 그의 말에 한 가지 단서를 얻었다.
“아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구나. 그게 혹시 로위나 카시어스는 아니겠지.”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얻지 못했어. 황녀님.”
꽤 눈치가 빠른 황녀였다. 로위나도 이렇게 눈치가 빨랐다면 그의 마음을 아는 것쯤은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엘렌은 살짝 아쉬운 기분이었다.
“차라리 황녀님이 직접 황태자를 죽이는 건 어떨까?”
베로니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베로니카를 잠시 보다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쁘지 않은 방법 같은데.”
“난…… 못 죽여.”
“왜?”
엘렌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베로니카도 마찬가지였다.
“황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제 형제를 쉽게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남의 손을 빌려. 황녀님 앞에도 있잖아.”
베로니카는 고민했다. 이대로 가다간 황궁의 기사들에게 잡혀 처형장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면 그대로 전과 같은 전철을 밟을 테지.
이건 모두 안셀모를 죽이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죽인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버지가 알 거야. 안셀모를 죽이는 방법.”
엘렌은 베로니카 황녀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황족에게 그의 능력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소 사람의 생각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던 엘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베로니카 황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믿지 않는 눈치네. 무엇으로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안셀모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만으론 증명이 되지 않나?”
“황녀님은 별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은 몸이야.”
베로니카는 아까의 엘렌을 흉내 내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맞아, 안셀모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죽일 수 없어. 이미 그 애의 영혼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보통의 방법은 통하지 않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베로니카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여긴.’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알렉산드로 대공자?”
베로니카는 속삭였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장소였다. 금실을 엮어 만든 태피스트리와 붉은 융단으로 만든 카펫. 그리고 진한 모란꽃 향기가 났다.
황제 폐하의 침실이었다.
“흡.”
베로니카는 잠시 손으로 코와 입 주변을 막았다. 실내에 도는 꽃냄새가 너무 진해서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모란꽃 냄새가 이렇게까지 진하게 나다니.
그녀는 곧 황제의 침실 구석에 놓인 향초에서 이런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와 침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은은한 모란 향이 났었지, 이리 진하게 냄새가 나진 않았다.
아마도 안셀모가 한 짓이겠지.
뭐든지 아버지를 챙기는 일에선 과한 아이였다. 베로니카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 커튼 너머에 있는 침대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건 황제일 터.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베로니카는 흠칫 몸을 떨며 다시 한 번 사위를 살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으레 하나는 있을 거라 생각했던 호위기사나 시종이 보이지 않는다.
알렉산드로 대공자가 미리 손을 써서 치워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방에는 황제와 베로니카, 단둘이 남은 것이다.
침대로 다가가는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쿵쿵,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이내, 커튼을 걷었다.
“……!”
황제가 누워 있었다. 누가 본다면 곤히 잠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폐하, 일어나세요.”
“…….”
황제는 독을 먹고 쓰러진 사람의 행세를 하고 있었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보았다. 제 말소리가 들리자 그의 눈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던 것을.
베로니카는 헛웃음을 지었다. 눈앞에서 그녀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받자, 허탈하고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셨어요.”
대답이 돌아올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묻고 싶었다. 왜 아버지는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 그러나 베로니카는 알았다. 황제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던 것인지. 시간을 돌리기 전에 살았던 자신은 온실 속 화초처럼 길러져 언젠가 누군가에게 예쁜 포장지로 씌워져 나갈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똑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해서 하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녀는 누군가의 그림자 아래서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자신 나름대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회귀 전과는 달리 그녀도 대회의에 참가하기도 했고, 사교계에 비밀리 참석하며 암암리 귀족들과 연을 돈독히 이어가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황제가 자신이 안셀모의 앞날에 장해물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황제, 자신을 이용해서 안셀모를 황위에 올리는 동시에 베로니카, 그녀를 없앨 궁리를 한 것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추측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싶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카시어스 공녀가 줄곧 후계로 키워지다가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후계위를 동생에게 위임했다고 했지.
지금 그 일을 떠올려보면 위임한 것이 아닌, 강탈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공녀처럼 황궁을 나갈 수도, 계승권을 위임할 수도 없었다. 포기하는 거라면 몰라도.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마 어머니도 알고 계시겠죠.”
베로니카의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의 뜻대로 되게 만들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