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나는 그 말에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제 알았다.
황녀의 탈옥과 나 사이에서 연관을 찾으려고 했던 거겠지. 아니면 단순히 참고인 정도로 조사한 걸 수도 있고.
그런데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거란 강렬한 촉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바이올렛이 리카르도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리카르도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녀에게 나는 당황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너절해진 손목을 보고.
“바이올렛. 먼저 그 손부터 치료하러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렇게 내버려 두면 덧날 수도 있어요.”
이러다가 평생 검을 들 수 없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괜한 오지랖이지만, 내가 얽힌 일이라 찝찝한 여지를 남겨두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소고집인 건지.
‘나부터도 소고집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리카르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다.
“공작님, 경이랑 의무실로 같이 가주세요.”
“다친 건 발목이 아니라 손목인데, 왜 내가 같이 가야 하는 거지?”
차가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그의 반응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무표정했다.
“그래도요. 원인은 경이 제공했더라도 다치게 한 건 공작님이잖아요.”
바이올렛을 의무실에 보내고, 좀 이따가 같이 만나서 대화해요.
나는 리카르도에게 대충 이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리카르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바이올렛도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차라리 나와 리카르도를 단둘이 둘 바엔 저와 같이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홀로 사무실에 남은 나는 오늘 새벽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 새벽은 보름달이 예쁘게 떠올랐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엔 알렉산드로 대공이 저택을 찾아왔었고.
‘새벽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황녀가 탈옥한 게 전부는 아닌 모양이다. 이상한 기분이지만 나는 그것을 꼭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마물의 숲.
초록빛으로 푸릇했던 숲은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이젠 기묘하게 비틀린 나무들 위에 맺힌 열매도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색깔과 형상을 띠고 있었다. 간간이 날아다니는 새도 눈이 하나만 박혀 있거나 아니면 무수하게 많이 박혀 있다.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곳 한가운데에 베로니카 황녀는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채 주위를 보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나무를 하나 꺾어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꽤나 익숙한 몸짓이었다.
어렸을 때 안셀모가 검술을 연습할 때 어깨너머로 보며 홀로 연습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전과 연습은 다른 법이기에 그녀는 마물이 혹여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는 걸 여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반항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여기서 불안에 떨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건 직성에 맞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베로니카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마물의 숲은 맞는데, 마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누가 고의적으로 마물들이 오지 않도록 막은 것처럼.
“엘렌 알렉산드로?”
베로니카는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이 마물의 숲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채를 가진 푸릇한 머리가 은색 로브를 펄럭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
베로니카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보았다.
“사람 좀 따돌리느라.”
엘렌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대화를 하는 건가?”
베로니카는 저에게 반말로 응수하는 사람에게 저 또한 꿋꿋하게 존댓말을 고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티타임 하기엔 좋은 곳이지?”
엘렌은 엄지와 중지를 마찰시켰다.
딱!
마찰음과 동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티테이블과 찻잔들. 찻잎들이 나왔다. 찻잎은 대부분이 홍차류였다.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를 단 과자들이 접시를 꽉 채웠다.
“마법이란 효용이 좋군.”
“귀찮은 게 많은 사람에겐 아주 제격의 능력이지.”
엘렌은 한 입 홍차를 마시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이건 로위나가 별로 안 좋아하겠는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베로니카는 작게 대답했다.
“……그러네.”
자신을 귀찮게 굴던 사람들을 마법 하나로 바다에 치워버리는 일도 가능하겠지.
잠시간 엘렌 알렉산드로의 비화가 떠올랐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베로니카도 잠시 그의 능력을 빌려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마법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검술과 병법에 그녀는 뛰어났다. 그것도 안셀모보다 더욱.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스승조차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되돌려지기 전.
그녀는 이대로 있다간 안셀모가 황위를 물려받자마자 외국으로 시집을 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 하나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했는데, 결혼까지 그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개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황궁은 겉만 화려한 새장이었다. 언제든 곱게 키워서 다른 새장에 보낼 준비를 하는, 그러한 곳.
차라리 로위나 카시어스처럼 가출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생각난 한 인물에 베로니카는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쓰러진 척했던 건가?”
“좋을 대로 생각해. 나는 황녀님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거든.”
면전에 대고 남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베로니카는 그의 반응이 신선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한테 물을 게 있다고 했지? 그러면 나도 궁금한 게 있어.”
알렉산드로 대공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두색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주 보는 청록색 눈동자도 그러했다.
“로위나 카시어스의 행방을 알아?”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던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싹 달아났다.
베로니카는 이제야 그의 진짜 표정이 드러났음을 직감했다.
“로위나? 그녀를 왜 찾는 거지?”
“호기심. 더 설명이 필요하다면, 나를 가십거리를 찾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돼.”
베로니카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를 찾는 구실을 부러 만들어냈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한 성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렌이 서늘히 웃었다.
베로니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한 얼굴로 말했다.
“이전의 그녀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행보였어. 그녀라면 그런 식으로 가문을 나가지 않았을 테니.”
“이전엔 어땠는데?”
엘렌이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귀족들이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틀에 잘 들어맞는 영애였지.”
베로니카는 반죽에 틀을 찍어내는 시늉을 했다.
“……흐음.”
엘렌은 그녀의 말에 생각에 빠졌다. 로위나는 사교계에 나온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황녀는 로위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거지?
그러나 답은 그리 멀리 존재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황녀. 그녀도 시간의 역순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황녀의 말이 이상했다.
그녀는 로위나도 회귀를 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위나의 마음을 통찰로 읽었을 때 그녀는 회귀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남는 가능성은 딱 하나.
기존 로위나 안에 있던 영혼은 증발했거나 어디로 이동되었단 이야기였다.
시간이 돌려지는 동시에 왜 그녀의 영혼이 사라졌을까.
작은 의문이 남지만, 엘렌은 지금의 그녀가 좋았기에 굳이 되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가 되돌리려고 한다면 그는 바로 막으러 갈 것이다.
엘렌은 그 시간을 돌린 사람이 황태자라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황태자가 로위나한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러 황궁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귀찮은데 그냥 날려버릴까.’
그냥 황궁에서 로위나만 빼서 황궁을 통째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로위나가 질겁하며 그를 꾸짖을 것이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자, 매혹적인 처리방법이었다.
“대답은?”
베로니카 황녀가 답을 채근했다. 엘렌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는데?”
“역시 마르그리트 부인이 카시어스 공녀구나.”
베로니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설핏 스쳐 지나갔다.
“그게 중요해?”
엘렌은 그 말에 부정하는 대신 궁금해졌다. 눈앞의 황녀가 왜 이 사실을 놓고 이렇게까지 매달리고, 좋아하는 건지.
“꽤 많이.”
그의 물음에 베로니카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공자는 이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것 역시도.”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안셀모가 건드렸을 리 없어.”
“황녀님의 질문은 이제 끝났어. 이제 내가 물을 차례야.”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초여름의 색이 담긴 듯한 눈동자에 한겨울처럼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황태자를 죽일 방법을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