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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87화 (88/124)

87화

대공의 말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런데 사무실 안이 어쩐지 허전했다.

‘아….’

베로니카 황녀가 없구나.

그날 잡혀 들어갔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머리가 멍해 그 일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한 사람이 또 없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카르도, 그가 없었다.

베로니카 황녀와 같이 늘 내가 오기 전에 사무실에 있던 그가 왜 오늘은 없는 거지?

평소라면 그냥 허투루 넘겼겠지만, 바로 어제 황녀가 수감이 되었다.

‘설마 리카르도도?’

만일 안셀모가 황위 다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황녀보다 리카르도 쪽이 더 위험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꾸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곤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을 나온 나는 지나가는 시종 하나를 붙잡고 리카르도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시종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순히 늦는 걸까.’

괜히 마음에 걸렸지만, 단순한 기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회사, 그만둘게요. 사장님.’

얼마 전, 아일라는 나에게 통보했다. 그때 막 감옥에서 나온 아일라는 빌린 저택에서 쉬는 중이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의연한 표정을 지어도, 그녀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농도 짙게 깔려 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단순히 일하기 싫어서 그렇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러나 그녀가 그런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마도 한 번 용의자로 몰린 자신이 회사에 계속 다니면 회사의 이미지가 손상될까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그간 고생했을 그녀를 위해 회사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일라의 일도, 리카르도의 일도, 엘렌의 일도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풀린 일이 없어 마음이 찝찝했다.

서류를 보고 있자, 차차 조사단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지 사무실 문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말하면서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조사단원들은 출근할 때 노크를 하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 조사단원들이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마리어스 기사였다. 이번엔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황녀를 잡아갔던 일이 눈앞에 선연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그녀가 온 이유가 리카르도를 데리러 왔다는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무슨 일이죠?”

“부인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부인께 접촉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새벽….”

오늘 새벽엔 아무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잠깐 대공이 나를 만나러 왔지만, 오후 9시쯤 되었으니 굳이 따지면 새벽이 아니라 저녁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대로 대답을 한다면 답만 듣고 홀연히 나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답부터 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인.”

그녀가 냉담한 어조로 내 물음을 튕겨냈다. 딱딱하군. 그러나 나는 그 반응을 모른 척 말했다.

“에르도안 공작님이 보이지 않는데, 그분은 어디 계시나요?”

대답을 듣기 전까지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리란 조짐을 발견했는지 바이올렛은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무 수행 중이십니다.”

거짓을 고하는 얼굴은 아니다. 아니, 저 철옹성 같은 얼굴을 보아선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새벽엔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요.”

“새벽 내내 깨어 계셨습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저하와 만난 후, 생각이 복잡했던 탓이다.

그의 말대로 황녀가 잡힌 이상, 황궁엔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것이다. 황태자가 반듯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잠시간 떠올랐다 사라졌다.

단정하고 말끔한 인상으로 여자나 후리고 다닌다고 소문이 퍼져 있으나, 실제로 만난 그는 더 질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쓰러진 틈을 타서 제 누이를 감옥에 보내다니.’

역사서에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나오지만,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고서는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황태자, 혼자만의 소행이라면 한 가지 풀리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나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려는 바이올렛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바이올렛.”

“……?”

“당신들은 누구의 명을 따르고 있는 거죠?”

“태자 전하입니다.”

“……그러면 태자 전하의 명을 따르라 명령한 사람이 따로 있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폐하께선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 폐하의 명이 아닌, 태자 전하의 명을 따른다고요?”

처음부터 이상했다. 리카르도가 마리어스 기사단의 통솔권을 황제의 명도 없이 그리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

아무리 황제가 쓰러졌을 때, 마리어스 기사들이 없었더라도 황제의 명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리카르도는 계속 마리어스 기사단을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내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그러나 끝내 도달하고 말았다.

그것도 진실에.

“폐하께서…… 애초에 쓰러지신 게 맞나요?”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이러한 상황이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이올렛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목격했다.

“황제 폐하께선, 독을 마신 게 아니었군요.”

그 말에 바이올렛은 고민하는 눈빛을 하더니 이내 나를 붙잡았다.

“잠시, 저 좀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싫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여기서 그녀를 따라가면 좋은 일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반평생 넘게 펜만 잡은 이랑 무력만 키운 이의 완력 차이는 확실했다. 속절없이 바이올렛에게 문 쪽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에르도안 공작께서 여기 무슨 일로….”

바이올렛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가 처음 보는 그녀의 표정 변화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내 팔을 잡은 바이올렛의 손목을 리카르도가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윽!”

“다시 검은 쥘 수 있을 정도로 조절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댄 폐하의 심복이었으니.”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래봤자,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그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실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괜찮나?”

“괘, 괜찮은 것 같아요.”

리카르도가 붙잡힌 내 팔을 들어 올렸다.

“아!”

나는 알싸하고 둔탁한 고통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리카르도는 차가운 얼굴로 ‘잠시, 실례하지.’라는 말과 함께 내 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멍이 시퍼렇게 올라 있었다.

누군 손목이 부러져도 미간만 찌푸리는데, 멍이 좀 들었다고 비명을 빽 지르는 모습이라니.

무언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심하게 멍이 들었군.”

자신이 다치기라도 한 듯 그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뼈가 부러진 사람도 있는데요, 뭘.”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리카르도는 내 말에 무척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야기가 다르긴 했지. 이쪽은 멍이고, 저쪽은 최소 붕대 신세를 면치 못할 테니까.

지금 내가 다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모두 바이올렛이 나를 끌고 가려다가 생긴 일이었다. 그녀가 나를 끌고 가려고 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이게 모두 황제가 일으킨 일이다.’

내가 추측한 바가 정확한 것이다.

그게 사실이니 바이올렛은 나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일 터. 데리고 가서 나를 신문하려고 했겠지.

‘그러면 대체 왜 황제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줄곧 사건의 초점을 황태자에게만 맞추었지, 쓰러진 황제에 대해 맞출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 리카르도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공작님은 오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내 물음에 리카르도는 서늘한 눈으로 바이올렛을 흘끗 보며 나를 다시 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감옥에서 사라지셨다고 하더군.”

“각하!”

뒤로 물러나 있던 바이올렛이 그의 말에 소리쳤다. 도리어 바이올렛의 반응은 리카르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시켜주는 꼴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멍한 얼굴로 질문했다.

“오늘 새벽에 있던 일인가요?”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호출을 받고, 입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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