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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86화 (87/124)

86화

“네?”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까닭이 내가 로위나 카시어스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엘렌에 대한 사건이 아니라, 나에 관한 일 때문에 그가 나를 만나러 왔다고?

정말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에 나는 갈피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른 채, 할 말을 잃었다.

“엘렌의 일이 아니라요?”

“그 아이는 알아서 잘 깨어날 거라 믿는다.”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말씀 같은데요.

“그럼 집무실의 일은요?”

엘렌의 일 때문에 황태자의 집무실까지 찾아가 난리를 친 사람이라고 하기엔 상황과 말의 어폐가 안 맞지 않는가?

“그런 밑밥을 깔아야, 외부에서도 우리의 만남이 엘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모든 행동이 그의 계산에서 나온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에, 엘렌은요.”

“원래부터 안중에 없었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엘렌이 부디 이 사실을 모르길 바랐다. 아들이 쓰러졌는데 신경도 쓰지 않는 부모님이라니.

‘아니, 알아도 엘렌은 별 신경도 안 쓸 것 같긴 해.’

진짜로 부전자전이란 단어가 쓰일 시점은 여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서 대공 저하께 부탁했나요?”

나는 더듬더듬 그나마 추측되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대공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개인적으로 걱정이 되어 왔단다.”

“실례지만 이유가 뭔가요…?”

그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를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엘렌은 어떤 훈육으로도 통하지 않는 녀석이야. 정상인으로 만드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 애를 바로 잡아줄 사람은 네가 유일했지. 내가 네 행방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이유가 다 거기에 있었단다.”

그의 눈동자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널 데려왔다가 네가 엘렌이랑 절연이라도 하면 어떡하느냐? 그러면 그 녀석이 최소한의 도덕성도 챙기지 않고 난동을 피울 터인데.”

“그러니까, 제가 엘렌의 브레이크였다고요?”

“브레이크가 뭐지?”

대공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듯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설명하자면 제어장치 같은 거요…….”

말하면서도 민망한 느낌이다.

내가 그의 제어장치?

엘렌은 그냥 본인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가 내 선에서 통제가 되었다면 내가 그로 인해 난감하거나 민망한 일을 겪을 일은 없었겠지.

“브레이크. 유념해야겠구나.”

대공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념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다 그 아이의 배필이라도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는 차를 홀짝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게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새아가. 정말 생각은 없는 건지 궁금하구나.”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이젠 호칭까지 바뀌었다.

“엘렌을 걱정하실 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간 일어나겠지.”

“그러다가 영영 못 일어나면요?”

“그건 그때 생각해볼 일이고.”

정말 관심 없다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어쩐지 엘렌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엘렌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끝내 참으려고 했던 한숨을 기어코 밖으로 내쉬었다.

내 속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대공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혼수상태인데 저렇게 태평히 웃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단순히 제가 걱정되어서 오셨다는 말씀인가요?”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다. 로위나. 네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빠졌는지 심각성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지금 그 자리는 불길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어. 이 정도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한 너라면 알고 있겠지?”

대공은 리카르도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처럼 나는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건가요? 연회 때부터?”

내가 일부러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왜 절 가만히 내버려 두신 거죠?”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대공은 저가 거짓말을 한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이에 추궁한다면 대답은 해주겠다는 듯 보여 나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에게 내 얼굴을 감출 필요는 없었으니까.

실내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 결을 스쳤고, 열이 몰렸던 머리도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대공은 황실의 일에 얽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후계자를 두고 일어나는 일의 종류를 기피하는 편이었지.

일반 귀족들이 그런 소신을 갖고 ‘난 누구의 편도 아니오.’ 하는 태도를 취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뻗대다간 제대로 된 줄도 하나 못 타고 바로 좌천이 되어버릴 테니까.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건 황제조차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는 알렉산드로 가문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을 돌이켜보면 참 신기했다. 어릴 때부터 대공가와 카시어스 공작가는 왕래가 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시어스 가문은 대공가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전가주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늘 황실의 후계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카시어스 가문은 황녀가 태어났을 때도 제국엔 황자가 필요하다며 강경하게 주장했다고 들었다.

제국엔 달이 아니라 태양이 필요하다며, 옛적의 고리타분한 사고에서나 나올 법한 주장을 했다.

반면에 알렉산드로 대공 가문은 황녀든지 황자든지 어느 쪽이든 황위에 어울리는 이가 황위에 오르길 바랐다. 이 역시도 관조적인 시선이었다.

그렇기에 난 아직도 두 가문이 잘 지내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만큼 두 가문의 가주는 성향이 극과 극이었기 때문이다.

대공이 모른 척하는 이유로 짐작되는 바는 하나였다.

“설마 아버지가 태자 전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요?”

제발 이러한 이야기로 흘러가진 않기를 바랐건만.

불행하게도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무슨 부탁을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의 행동엔 아까와 같이 거짓스러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자세한 건 듣지 못했어. 엄밀히 따지면 나는 태자 전하의 편도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 너도 알다시피 공작과 이러한 일을 사사롭게 주고받는 입장은 아니지 않으냐. 그러니 로위나.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니?”

나와 황태자의 대화를 모르는 대공의 말에선 걱정과 배려가 묻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말로도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황궁의 지하 감옥에 수감 되는 사람은 산 채로 짐승 밥으로 던져지더라, 아니네. 서서히 고통을 느끼도록 사지를 하나하나 끊어 놓더라.

이따금 시녀들이 두려운 얼굴로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베로니카에겐 흥미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냥 평범한 감옥이군.’

그녀는 쇠창살을 한번 만져보며, 차가운 촉감을 느꼈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온도였다. 여자 혼자 감옥에 갇혀서 엉엉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앞에 있던 간수는 질린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눈을 마주치고선 찔끔 고개를 숙였다.

조소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를 흘긋 보다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안셀모와 황제가 자신을 내치려고 작정한 만큼 식사가 그리 잘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체력을 아껴두는 편이 좋겠지.

베로니카는 그러한 결론에 다다르자 앉아 있는 것보다 체력을 비축하기에 효율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자세를 떠올린 그녀는 조용히 바닥에 누웠다.

바닥이 차가웠기에 두꺼운 드레스를 입고 온 것이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귀를 바닥 쪽으로 갖다 대며 누워 있던 베로니카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누군지만 확인하려 했던 베로니카는 누군지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주위에 있던 간수들은 어느새 바닥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당신은…….”

“안녕, 황녀님.”

남자의 푸른 머리카락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연녹색의 눈동자는 웃음기 한 점 없이 차가웠다.

“궁금한 게 좀 많은데, 시간 좀 괜찮아?”

양해를 구하는 말과 달리 어느새 그는 감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였다.

베로니카 황녀는 처음으로 살갗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이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거절하면?”

소문대로 듣던 것처럼 이상한 이였다. 연회 때 간혹 마주치긴 했으나, 그는 참석할 때마다 5분 정도 장 내에 있다 사라지곤 했으니.

말을 섞어보는 것은 이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타락 천사 같은 그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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