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대답해달라는 말은 여태까지 내가 그에게 거짓을 말했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생각하시오. 솔직하게만 대답해주면 되오.”
그가 처음으로 앞에 있는 찻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걸 입에 대지는 않았고, 찻잔의 모서리만 손가락으로 쓸고 있었다.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저걸로 응징하겠다는 신호인 걸까.
황태자의 집무실이 엉망진창이 되던 모습을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했다.
나는 곁눈질로 그가 던질 물건이 있는지 빠르게 살폈다.
사방에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과 장식품이 눈에 띄었다.
‘저거 싹 다 치우라고 할걸.’
심지어 황태자의 집무실은 그리 장식품이 많은 편도 아니었는데, 대공이 한번 휩쓸었다고 발 디디는 곳마다 성한 부분이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되었지 않았는가.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인상이 깊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엘렌의 일이 황실과 연관이 있소?”
“그건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저하.”
“엘렌의 능력을 알고 있소?”
“능력이라 말씀하시면?”
나는 그 말로 그가 나를 떠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내가 먼저 한 질문에 대답해주었으면 하오.”
“죄송합니다, 저하. 대공자께선 훌륭한 마법사십니다. 그것을 모르는 제국민은 없죠.”
“…그런 아이가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 리 없을 텐데, 일이 참 묘하게 돌아갔단 말이오.”
말투는 점잖았으나 대공의 눈엔 불길이 맹렬하게 치솟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릴 뻔하였다.
‘제발, 그 손에 있는 찻잔 좀 내려주시죠.’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찻잔을 손에서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공자님의 일은 다시 한 번 유감을 표합니다.”
“듣기론 폐하 사건을 맡는 조사단장이 엘렌의 일까지 처리하게 되었다고 들었소. 그게 바로 부인이라고.”
“네, 맞습니다.”
아마 황태자는 난동을 피우는 대공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 폭탄을 나에게 떠넘겼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게 내가 바라던 바였고.
그러나 알렉산드로 대공이 한밤중에 여기까지 온 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일은 저질렀는데.’
신문사 제보로 엘렌의 일을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으로 해결할 생각이 조금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대공이 나서서 그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거라 믿었으니까.
한낱 백작 부인의 신분인 나보다 대공인 그가 황실에 엘렌의 일에 의문점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리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가 황실에 던진 부메랑이 나에게까지 도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대공의 정보력과 아들에 관한 깊은 애정을 간과한 것이 착오였다.
하물며 대공이 나처럼 엘렌이 ‘통찰’ 때문에 입막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아직은 엘렌이 쓰러진 이유를 확실히 모르는 상태였다. 정황상 황태자의 소행이 맞지만, 그걸 증명하는 증거도 없었으며 그걸 증거도 없이 대공에게 말했다간 어떤 사달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증거가 있어도 대공에게 말하는 사람이 내가 되어서는 위험했다.
황태자가 나에게 카시어스 가문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가문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절대, 절대 안 돌아갈 거야.’
그 연회 날,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았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공작 가문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은 별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지는 게 수치스러운 거지.’
아버지는 늘 체면과 품위에 목을 매는 분이었고,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 그녀는 늘 격식이나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영애나 영식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하나를 보면, 그 가정을 알 수 있다며 날카롭게 비판한 적도 있었지.
그런 분이 나란 존재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질까.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사실 가면을 쓰지 않고 황궁 연회장에 참가하더라도, 어쩌면 그분들은 나를 모른 척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엘렌에 관한 조사엔 차도가 있소?”
그의 질문에 나는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발견된다면 대공저에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발견된 게 없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하실 말씀이 남으셨나요?”
“한 가지, 부인께 하고 싶은 말은 있소.”
딱딱했던 대공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조금 부드러워진 그의 표정에 얼핏 수심과 걱정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엘렌이 그토록 걱정되는 모양이다.
무릇 자식을 아끼던 대공 저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를 위로할 말들을 대충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는데, 대공의 입에서 나온 건 뜬금없게도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카시어스 공작 부부가 공녀를 애타게 찾고 있소.”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렌에 관한 말이 나올 줄 알았건만, 이게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나만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카시어스 공녀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대공의 말만큼은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내 이성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설사 황제가 부모님이 나를 찾는다는 말을 했더라도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 부부께서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무슨 뜻이오?”
대공이 눈썹을 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녹색 눈엔 의아함과 우려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뒤늦게 혀를 씹고 싶은 기분이었다.
‘입이 방정이지.’
나는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대공 저하, 카시어스 가문의 일은 공작저에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심이 좋지 않을까요? 저는 사적으로도 그분들과 아는 사이가 아닌지라 무어라 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주제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면 나에게 불리했다. 명백히 선을 긋는 내 어조에 대공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엘렌의 이야기를 꺼낼 때보다 걱정이 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지. 로위나. 이미 공작 부부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단다.”
그는 타이르듯 부드러이 말했다. 어린애의 치기를 마주하는 듯한 태도보단, 친딸을 보듬는 듯 작은 애정이 묻어나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혹스러웠다.
엘렌에게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던 분이, 나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것이 이상하리만치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대공의 말이 이상했다.
부모님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나도 짐작하던 바였다. 그런데 마치 대공은 먼 옛날부터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언제부터요?”
“네가 딱 출가했을 때부터.”
“엘렌이 분명…….”
엘렌이 나에 관한 종적을 모두 말소시켰다고 했었다. 무엇 하나 믿을 구석이 없지만 증거 인멸이나 흔적 따위를 없애는 건 그의 특기였는데.
“그 아이는 나도 못 믿는 아이지.”
안 믿는 게 아니라 못 믿는 거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해답을 얻었다.
‘엘렌이 가문에 돌아갈 생각은 없냐고 말하던 것이 이미 이런 수작을 벌이고 간을 보고 있던 거라니.’
이가 절로 으득 갈렸다.
‘설마.’
엘렌이 이 일까지 예견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미리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것일까.
그럼 왜.
그는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인가?
그 자신의 일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의 상태를 떠올리자 분노는 빠르게 식어 내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본인 몸이나 열심히 살피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죄책감도 들었다. 그저 아일라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에 엘렌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원작에만 맹신하여 서브 남주인 그가 여주를 돕는 것을 마땅한 일로 치부했던 내 이기적인 생각의 흐름이 원망스러웠다. 또 죄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고개를 깊이 숙여 그에게 사과했다.
“로위나.”
“제가 꼭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을 매듭짓도록 할게요. 그때까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 나는 네가 이 일에서 손을 떼기 바란다.”
그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너무 위험해졌어. 결국 베로니카 황녀님까지 수감 되셨으니.”
그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간밤에 노루잠 자듯 한 피곤한 안색이 이제야 눈에 띄었다.
“내가 여기까지 연통도 없이 온 이유는 딱 하나란다.”
그의 녹색 눈에 두꺼운 막이 벗겨진 듯 진심 어린 걱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네가 로위나 카시어스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