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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83화 (84/124)

83화

“이제 우리 사이에 뭘 숨기진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누님.”

안셀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로니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베로니카는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세게 밀며 말했다.

“반란군의 짓이 아니었어. 그렇지?”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

베로니카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었다. 몇 년 전부터 아침에 일어난 베로니카는 한 가지 이상함을 감지했었다.

모든 행위가 한 번씩 거쳤던 것 같은, 미묘한 기시감.

사교계를 나가서 듣는 영애들의 대화와 시녀들이 하는 잔소리가 언젠가 다 들어본 것 같은 낯익은 소리들이었다.

예지몽이라도 꾼 건 아닐까, 처음엔 그리 치부했었으나 황제가 음독으로 쓰러진 걸 보고 그녀는 깨달았다.

‘안셀모가 금기를 범했다.’

그가 어떤 영혼을 제물로 바쳐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그걸 확신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그저 기묘한 기시감만 느꼈을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소처럼 똑같은 말들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베로니카는 마치 예전에 보았던 연극을 다시 한 번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투명한 벽 너머로 동떨어진 기분.

그러면 이것은 황실의 피를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였다.

그녀는 그것을 한 달 만에 깨달았으나, 황제에게도, 안셀모에게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을 나누기엔 그들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다른 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발견한 특이점은 바로, 카시어스 공녀의 행적.

사교계에 나오면 늘 부모님께 순종적이었던 카시어스 공녀가 이번엔 사교계에 두문불출했다.

사교계에 도는 소문으로는 후계 수업에만 몰두하느라 사교계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했다.

이건 베로니카가 알고 있던, 기존의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심지어 누구에게나 벽을 두껍게 치는 알렉산드로 대공자와 공녀가 친해졌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유독 카시어스 공녀에 관해서는 그녀가 예상한 방향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카시어스 공녀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땐, 이미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 출가를 했다는, 공녀의 소식만 떠다닐 뿐이었다.

실망스러웠다. 어쩌면 이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지.

그러나 베로니카는 자신의 감정을 굳이 선명하게 마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잊어버렸다.

그리고 돌아왔던 길을 다시 걷는 것 같은 생활을 몇 년.

또 전과 다른 특이점이 재차 발생했다. 그 간격은 그리 멀지 않았다.

수도로 귀환한 리카르도의 북부행 날짜가 자꾸만 미뤄지는 것과 레니에 후작 영애의 출가.

이 사건의 중심에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르그리트 백작가.’

전엔 절대로 들어본 적이 없던 가문의 이름이었다.

한번은 리카르도에게 그 가문에 관해 물어봤지만, 수상하다는 눈초리만 잔뜩 받고 제대로 된 정보는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베로니카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그녀는 레니에 후작 영애의 파트너로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베로니카와 같이 마르그리트 부인을 진득한 시선으로 좇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바로 리카르도 에르도안과 그녀의 동생인 황태자 안셀모.

이어 부인은 한바탕 에스텔라 영애와 말다툼을 한 뒤 안셀모와 함께 의무실로 향했다.

누가 본다면 단순히 황태자의 불륜 상대로 치부할 광경이지만, 전후 상황을 알고 있는 베로니카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이 단순히 불륜 상대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큰 비밀을 숨기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의무실 밖에서 언제 들어갈지 타이밍만 엿보고 있을 때.

황제가 와인을 마시고 쓰러진 것이다.

베로니카는 혼란스러웠다.

제 부친도 그녀와 동일한 기시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연회에 나오는 와인에 입을 대지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녀는 자신이 조금, 아니, 많이 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지는 와중에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내 기회만 보며 정작 카시어스 공녀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놓쳐버린 것을 떠올렸다.

황궁의 기사들이 연회장에 들이닥쳤고, 기사들이 황태자 전하를 부르러 가겠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만류했다.

마침 의무실로 들어가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녀는 안셀모와 마르그리트 부인이 있던 의무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안셀모의 반응이.

-폐하께서 쓰러지셨어.

-뭐? 그래서 지금 상태는?

안셀모는 황제가 쓰러진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저 상태에만 관심이 있다는 듯이.

누군가는 사소한 이야기라고 넘기겠지만, 베로니카는 그렇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럼 한 가지 풀리지 않는 게 있어.”

베로니카는 역광으로 기이한 빛을 내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럼, 폐하는 알면서 와인을 마신 거니?”

“글쎄. 누님은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는데.”

진심이었다. 베로니카는 이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돌아올 대답에 목이 조금 탔다.

“모르는 게 나아.”

그녀의 속마음을 안다는 듯 안셀모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그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마리어스 기사에게 눈짓했다.

베로니카는 그의 말에 이미 답을 얻었다.

황제 또한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이 연회에서 와인을 먹고 쓰러질 것이란 걸.

애초에 그 와인에 독이 들어 있긴 했을까.

리카르도가 그 와인에 독이 있었다고 했으니 있었겠지.

아니, 리카르도도 안셀모와 한패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베로니카는 다가오는 기사들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안셀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왜…… 아.”

그녀의 입가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사실을 깨닫자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이제 알겠어.”

제 아비는 그녀를 버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 * *

나는 자택에 돌아오자마자 침실로 들어갔다.

‘피곤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책을 건네자마자 아일라는 석방이 되었고, 황녀는 역모죄로 잡혀들어갔다.

전쟁 시 포로를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찝찝해 죽겠단 말이야.’

괜히 내가 쓴 책 때문에 베로니카 황녀가 그러한 상황에 빠진 건 아닐까 싶었다.

-똑똑.

“들어오렴.”

집사 리온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실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당혹감도 섞인 듯했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나는 협탁에 놓인 탁상용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어느덧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연통이라도 미리 온 건?”

“없었습니다.”

“그럼 누구지?”

“…알렉산드로 대공 저하입니다.”

맙소사.

대공이 조만간 나를 만나러 올지도 모른다는 황태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걸 처음 알게 된 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엘렌의 아버지인 그는 일주일 전부터 틈나면 계속 저택에 방문했다.

그때마다 리온은 내 부재를 그에게 알렸지만, 대공은 꾸준히 연통을 보냈으며 그 연통에 적힌 시간에 맞추어 꼬박꼬박 저택에 방문했다.

그런데 이번엔 방법을 바꾼 모양이다. 연통을 넣지 않고 불시에 찾아오는 방법으로.

이게 검문소도 아니고.

마음이 불편했다.

알렉산드로 대공저에 방문할 때마다 대공 부인께서 나를 반겨주며 꽤 예뻐했던 것만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서 어떨 때는 카시어스 공작저에 있는 것보다 대공저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곳에선 가문의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자유롭게 쉴 수 있어, 나에겐 작은 숨구멍과도 같았다.

옛 추억에서 벗어난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자리에 없다고 해.”

“저도 그리 말씀드렸지만, 마님의 마차가 문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오셨다고, 이 안에 있는 거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

“그래도 대공 저하께서 직접 오신 건 아니지?”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리온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저택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대공이 한가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직접 오셨습니다.”

아들에 대한 걱정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고, 돌려보낸다고 한들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가면, 가면 어딨어.”

나는 서둘러 가면을 찾았다. 일단 이야기를 나누려면,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래도 거의 10년이 넘었는데,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을까.’

나는 알렉산드로 대공의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워낙 옛날이라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뿌옇게 떠오를 뿐이었다. 부디 대공 저하께서도 나와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계셔야 할 텐데.

“드레스 룸에 있는데, 필요하시면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침실을 나가는 리온의 눈빛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손님을 만나는 데 가면을 쓰고 나가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막상 응접실에 다다르자 나는 응접실 문을 열기가 무척 꺼려졌다. 난장판이 된 황태자의 집무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서도 난리를 치시겠어?’

거의 바람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 발생했다.

“로위나?”

‘망할.’

그는 나라는 것을 한눈에 보고 알아차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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