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리카르도가 서늘한 얼굴로 읊조렸다. 푸른 눈동자는 찬기를 머금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바로 그의 곁에 있던 나는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럴 작정이라는 게 베로니카 황녀가 역모죄로 몰리는 것을 뜻하는 걸까.
“어, 어떡해요. 공작님.”
“이권 싸움엔 상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오필리아. 그대도 알지 않나.”
리카르도는 냉담하게 일갈했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한다는 듯한 어조였다. 남의 일이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달 동안 같이 일하던 사이며, 사촌지간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끌려가면 황녀의 상황은 아일라보다 더 좋지 않게 흘러갈 수 있었다.
특히나 리카르도의 말대로 이게 이권을 두고 벌어진 행각이라면.
아마 황제가 음독을 당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기에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이렇게 황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두고 보는 일이 맞는 건가. 내가 머뭇거리며 상황을 살피는 사이 아일라가 움직였다.
황녀의 모습에서 저번에 끌려가던 자신이 투영되었는지 그녀는 베로니카 황녀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레니에 영애, 비키시오.”
기사들은 마치 차갑고 커다란 벽과 같았다.
“시, 싫어요.”
아일라가 미약하게 반항했다. 나는 아일라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다가 종내 그녀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결국 리카르도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반역을 했다는 거지?”
베로니카 황녀가 여전히 아일라의 등 뒤에 숨은 채 말했다. 황녀다운 위엄이 있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으나, 차라리 아무렇지 않은 척 끌려가서 반박도 못 하고 처형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 독극물이 황녀 전하의 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 안셀모.”
베로니카 황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리카르도가 바이올렛이 들고 있던 약병을 낚아채었다.
“……각하!”
“이게 그 약병이군.”
그가 돌연 약병의 뚜껑을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마리어스 기사들은 처음으로 얼음 같던 표정이 깨진 채로 당황했으나 어느 누구도 리카르도의 행동을 제지하진 못했다.
아마도 추측하기를, 과거 마리어스를 통솔했던 그에게 쉬이 반하는 행동을 취하기 힘들었으리라.
“무취군.”
그는 살짝 약병에 있는 내용물을 손등에 흘려서 입에 대었다.
“무슨!”
“각하!”
“공작님!”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리카르도의 행동에 기함했다. 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이미 원작을 통해 그가 독에 면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글로 읽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간극이 천지 차이였다.
“주,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 독으로 죽을 만큼 연약하지 않다.”
“맹독입니다. 각하.”
바이올렛이 딱딱한 얼굴로 그의 말에 반박했다. 리카르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과연 폐하께서 마신 와인과 같은 독이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상황이 심각하지만, 이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홧홧한 열감이 똑같군. 끝엔 찬기가 돌아.”
바이올렛은 리카르도에게 약병을 받으며 말했다.
“같은 독이 맞습니다. 방금 궁내의한테 독의 성분이 같다는 보고가 올라온 상태입니다.”
“독의 성분? 아직 독의 재료가 뭔지도 모를 텐데 어떻게 그 둘이 같다고 하는 건지 궁금하네.”
베로니카 황녀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기사들에게 잡혀갈까, 아일라의 등 뒤에서 숨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말에 나는 황태자의 집무실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렸다. 거기서 아일라가 분석한 성분 쪽지를 몸수색 과정에서 빼앗겼었지.
‘설마.’
아일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황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실 아직 그녀는 그 쪽지를 황태자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이상에 관한 이야기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베로니카 황녀는 결국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듯했다.
“…….”
그녀는 초연한 얼굴로 마리어스 기사들을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리카르도는 의자에 앉아 한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조사단원들도 은밀하게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내로라할 가문들의 자제들이었으니 그들이 어떤 상황에 휘말렸는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황녀가 한 짓이 아니야.’
이건 황태자가 부러 벌인 일이었다. 단순히 황위를 노린 것이라면 황녀까지 투옥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리카르도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내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안셀모한테 가볼 생각이다.”
“왜요?”
나는 그가 황녀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나는 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공작님!”
잠깐 사이에 저렇게까지 멀리 걸어갔다니, 다리에 모터를 단 것도 아닌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내 부름이 그에게까지 닿았는지 리카르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는 헉헉, 숨을 고르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헉헉, 소, 소용없어요.”
“무슨 뜻이지?”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공작님이 태자 전하를 만나도 소용없다고요.”
“무언가 알고 있군. 숨기는 게 뭐지? 재판이 오기도 전에 아일라 레니에는 풀렸고, 그 동시에 베로니카 황녀가 잡혀갔다. 하지만 그대는 그런 일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했지.”
“오해예요. 황녀 전하께서 잡혀가신 일은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에요.”
“오필리아, 지금이라도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리카르도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같은 말을 두 번 듣는 것이 좋게 들리지 않을 거란 건 알지만, 진지하게 고민해줬으면 하는군.”
“……그것이.”
이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라는 걸 말하면, 리카르도가 무슨 표정을 지을까.
“먼저 엘렌의 일이 해결된다면요.”
나는 이렇게 둘러대었다. 황태자와 나눴던 대화는 그가 굳이 비밀이라고 명명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비밀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비밀로 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엘렌 알렉산드로… 그대의 친우였지.”
알렉산드로 대공의 첫째와 카시어스 공녀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사실은 세간에서 그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소문을 알고 있던 모양인지 리카르도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꾸겼다.
“그와 아직도 교류하고 있었나?”
“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서 나는 바로 대답했다. 리카르도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생경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엘렌이랑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처음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요술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네?”
“첫 만남에 내 고민을 바로 파악하고 허니문을 소개해 줬었지. 기이한 사내였다.”
“아아… 그거요.”
나는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알렉산드로 공자가 쓰러진 일이 폐하의 일과 연관이 있는 건가.”
황태자는 그 일을 조사단이 아닌, 조사단장의 개인 몫으로 돌렸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 쪽에서 알리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가문의 일이 얽히니 모든 일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듣지 않아도 알겠군.”
리카르도가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이 모든 게 안셀모의 짓인가?”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려다가, 리카르도에게만큼은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숨기면 숨길수록 개미지옥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 * *
“안셀모. 이게 무슨 짓이지?”
마리어스 기사들을 따라온 베로니카는 그들이 자신을 안셀모의 집무실로 데려온 것을 깨달았다.
집무실로 끌려오듯 들어온 베로니카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앉아 있는 안셀모를 바라보았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누님.”
안셀모가 책상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며 말했다.
“갑자기 왜 조사단에 들어오겠다고 한 거지?”
그의 물음에 베로니카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거렸다. 안셀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이 누이가 깊이 생각에 빠졌을 때 하는 습관임을 알았다.
“아버지께서 쓰러진 일이야. 딸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하는데 뭐가 이상하니?”
“그럼 연회에서 공녀와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는?”
“공녀? 누구?”
베로니카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디에르 공녀를 말하는 거야? 내가 그때 만난 공녀가 한두 명이 아니라서.”
베로니카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안셀모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목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설마 했지만, 안셀모가 금기를 건드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이 사태가 생각보다 더욱 이상하고 가파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