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필적 조사요?”
황태자의 말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괜히 여기서 당황한 티를 내선 좋을 게 없어 보였다.
“네, 부인.”
황태자는 내 말을 기다리겠다는 듯 짧게 대답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쪽지를 펼쳐 보곤,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건 아일라의 필적이에요.”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제가 의뢰했답니다.”
“그렇군요.”
황태자는 보좌관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그의 눈짓에 보좌관은 함께 들어왔던 시종들과 시녀들을 이끌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로써 황태자와 나는 단둘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그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내가 이걸 의뢰했다고 방금 말을 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선 예상을 했을 것이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가 아일라가 왜 이러한 것을 알고 있냐며 나에게 추궁하지 않는 것이 이미 그 안에서 결론을 내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괜한 추측을 할 성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왜 재판이 열릴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바로 결론을 지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결론인지.
나는 괜히 불길해서 이어질 그의 말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성분을 이용해서 배후를 알아낼 겁니다.”
“…어떻게요?”
원작에서도 아일라가 배후를 알아낸 건 우연히 반란군의 행적을 잡아내어 가능했던 일이다.
황태자는 깍지를 낀 채 그 위에 턱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걸 묻는군요. 아일라 레니에 영애를 심문하는 겁니다.”
사건의 무게가 무거운 것에 비해 그의 말투는 산뜻하고 가벼웠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아일라는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그의 반응에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슬슬 이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요.”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왜인지 그는 이 말에 화를 내지 않을 거란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았다. 황태자는 손을 내밀며 까닥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어서 하라는 뜻이었다.
“제가 아닌, 전하야말로 따로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와 아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그의 종용에 흘긋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예언자라는 말은 뭔가요?”
“아.”
그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튼소리를 했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군요. 잊어버리십시오. 공녀.”
“…….”
아까 그가 먼저 마법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 말에 내가 설인에 관해 이야기하자마자, 그의 눈엔 열기마저 어려 있는 걸 나는 보았다.
“이 사건을 제가 맡게 된 이유와 연관이 있는 거, 맞죠?”
* * *
“사장님!”
“……아일라.”
아일라가 눈에 가득 물기를 머금으며 나에게 안겼다. 그녀는 완전히 독방이나 다름없는 황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저는 이 일이 무언가 잘못된 줄 알고 걱정했어요.”
아일라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안은 채로 속삭였다.
“그 쪽지는 어떻게 되었나요?”
“사정이 좀 길어요. 좀 이따가 이야기해요.”
지금은 사무실 안이었다.
베로니카 황녀와 리카르도, 그리고 사무실 안에 있는 조사단원들은 우리의 광경에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로 보는 눈이 많은 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야기 좀 나누지.”
“이야기 좀 나눠요.”
리카르도와 베로니카 황녀가 거의 동시에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그들이 무얼 물어볼지는 명확했다. 아일라 일에 관해 물어보겠지.
나는 일주일 전, 황태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빈 책 한 권을 주며 나에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적어내라고 말을 했다.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니 황태자는 그린 듯한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
“뭐든 좋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됩니다.”
“모든 걸요?”
“예를 들자면, 공녀의 입에서 설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거친 생각들이라든지.”
“…….”
이 이야기는 필히 그가 나에게 예언자라고 했던 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설마 황태자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섣불리 꺼내 볼 수도 없었다.
이젠 예언자라고 했던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일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일라 레니에를 구제할 방법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황태자는 나에게 하얀 백지만 가득한 책을 내밀며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싫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거절하면 아일라를 구제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내 제안을 승낙해도, 공녀가 이 책에 적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아일라 레니에의 처우가 달라질 겁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나는 그의 말에 책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엘렌의 마법은요? 이걸 적으면 그 애도 마찬가지로 풀어주는 건가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
“영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군요.”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속을 까뒤집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그러면 엘렌의 마법이 설인과 연관성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그건 내가 아니라, 공녀께서 말을 꺼낸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교묘하게 내 질문에서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단조로운 말투로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적힌 내용의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니, 이상한 내용은 적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집에 도착하고 집무실에서 빈 책을 보며 밤새 고민하던 나는 끝내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단장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난 너무 궁금한데.”
회상에서 벗어난 나는 어느새 가까워진 베로니카 황녀의 얼굴에 뒷걸음질을 쳤다.
“애초에 아일라는 범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재판도 없이 일이 처리되는 건 꽤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는 한 힘든 일이지.”
리카르도도 나를 보며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눈을 떴다. 나는 뜨끔했지만, 고개를 돌려 애써 그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뒤에서 알렉스와 아일라가 반가운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한 일이겠지…….’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쪽지를 나에게서 가져갔으니, 그걸 아일라의 재판에 증거로 쓴다면 외려 아일라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마치 지켜본 것처럼.’
아일라와 나 사이에 오간 것을 어쩌면 황태자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왜 내 행동을 막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 뒤에 있는 문 너머로 쿵쿵쿵, 소리가 들렸다. 철갑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얽혀 큰 소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돌연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예고 없는 방문자들의 행색을 살폈다. 묘한 문양의 철갑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모양인데….
“마리어스가 여기에 무슨 일이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리카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제의 기사단이 여기에 왜 온단 말인가.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무슨 권한으로 들어오는 건가요?”
“태자 전하의 명령입니다.”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황제의 휘하에서 일하는 직속 기사단이 왜 황태자의 명령을 따른단 말인가. 리카르도 또한 그 점이 이상했는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폐하께서 아직 살아 계시는데, 마리어스가 움직인다니.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리어스 기사들을 차갑게 훑었다.
“폐하의 명이기도 합니다.”
마리어스 부단장이었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졌을 시엔 특수하게 태자 전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근간을 흔드는 일?
예기치 않게 흘러가는 이 상황에 잔뜩 간이 졸아들었지만, 나는 겁먹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의 명령이라는 증거는 어디 있죠?”
“…….”
이러한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마리어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뒤에서 아일라가 걱정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내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사, 사장님. 설마 다시 저를 붙잡으러 온 건…….”
내 귓가에 걱정스러운 듯한 아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번지수가 한참 틀렸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마리어스는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누굴 데려가려고?’
나는 흘긋 뒤에 시선을 던졌다. 태연한 얼굴이지만, 부채를 잡고 있는 손이 옅게 떨리는 베로니카 황녀의 모습이 보였다.
“자, 잠깐!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나 싶었으나 리카르도가 그들을 막아섰다.
“단장의 말대로 명령서는 어딨지?”
에르도안 공작까지 말을 덧대자 기사들은 쉬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대장 격인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에솔라 클로비스, 당신을 반역죄로 구금하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