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사장님.”
슬슬 서류 업무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일라가 나를 붙잡았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알렉스에게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라 말했다. 알렉스는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인가요?”
“독의 성분을 일부 알아냈어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 그걸 알아냈다고?
나는 그녀가 약초학을 공부한 지 며칠이 지났는지 세어보려다가 의미 없는 행동임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지금까지 계속 궁내의한테 독에 관한 연구를 보고받았지만, 일부조차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일라는 작은 쪽지를 나에게 건네었다. 쪽지를 열어본 나는 약초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자들을 보고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봐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 성분으로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요?”
아일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상투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저희가 노력해볼게요.”
이 쪽지를 바탕으로 날조를 해서 반란군을 진범으로 잡는 것이 아일라를 살리는 길이 된다는 게 씁쓸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있는 인영에 깜짝 놀랐다.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분명히….
“태자 전하의 보좌관님?”
여전히 핏기없이 피곤한 낯이었다. 푸르죽죽한 얼굴로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문 너머로 아일라가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에 나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들킨 건가.’
아까 손쉽게 병을 찾아낸 알렉스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황태자의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으나, 어느덧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야트막한 한숨을 쉬며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엔 황태자가 여상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부인,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탐탁지 않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뒤에 있던 황태자의 보좌관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와 단둘이 남아 껄끄러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설마 보좌관이 있는 데서 나를 협박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나를 보는 황태자는 내 속내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인, 소지품 검사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의 소지품을 말씀하시는 거죠?”
“부인의 소지품이지요.”
젠장. 나는 그 사실을 회피하려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갑자기 왜 황태자는 내 소지품을 검사한단 말인가.
조사단장인 내 몸에서 음독에 쓰인 약병이 나오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 그 쪽지!’
아일라가 나에게 주었던 쪽지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미 어느새 내 뒤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는 하녀들이 쪽지를 발견하고 황태자에게 넘긴 뒤였다.
쪽지를 펼친 그는 쪽지의 내용을 읽고 나를 보았다.
“이 쪽지에 적힌 내용은 무엇에 관한 겁니까?”
“그게…….”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제가 개인적으로 독의 성분을 조사했습니다.”
어차피 독의 성분이라는 건 밝혀질 이야기였기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쪽이 나았다. 오히려 이것을 숨기려고 한다면, 나 또한 공범으로 몰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그가 자세를 고쳐 앉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다.
“…아는 지인한테요.”
“아는 지인이라. 궁내의조차 알아내지 못한 약의 성분을 알고 있다니, 보기 드문 인재라고 생각되면서도 수상하군요.”
“전하, 여기에 절 부르신 이유가 소지품 검사를 하려고 그런 건가요?”
“보시다시피, 제보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제보요?”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아일라 레니에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충 그런 종류의 제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을.”
화들짝 놀라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나는 애써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나를 보던 황태자가 쪽지를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건넸다.
“궁내의에게 전달하세요.”
“네, 전하.”
나는 황태자의 명령에 집무실을 나가는 보좌관을 아연한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내가 그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저 가만히 서서 결백한 사람인 척 행세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아까부터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어 빠르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듯 문은 잠겨 있었다.
“어라, 문이 왜 잠겼을까……?”
나는 황태자에게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이 고장 났나 보군요.”
황태자는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언젠가 고치러 올 사람이 올 테니 느긋하게 여기서 앉아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커피도 준비되어 있는데.”
“그렇지만 할 일이 바빠서…….”
나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단지 내 희망 사항에 그칠 것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황태자를 흘긋 보았다. 그는 나에게 관심 없다는 듯 서류를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나는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커피의 양이 줄지 않았군요.”
그가 언제 내 뒤에 다가왔는지 뒤통수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랬습니까?”
“…….”
어떻게 알았지. 나는 말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딱히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더더욱.
“농담이지만, 예의상의 부정조차 돌아오지 않으니 서운하군요.”
“누구라도 제 입장에 있으면 그걸 농담으로 치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내 대답을 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날 너무 미워하진 말았으면 하는군요.”
“그럼 엘렌의 마법을 풀어주세요.”
“그 마법을 보고 생각나는 건 없습니까?”
나는 그의 의뭉스러운 말에 미간을 구겼다. 엘렌의 마법을 보고 생각나는 게 없냐고?
“없는데요….”
“한번 차근차근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느긋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그의 금색 눈동자는 고민하는 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엘렌…. 저주 마법…. 사람을 깊이 잠들게 만드는 것.
지금까지 접한 사실만으로는 그의 상태를 보고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원작. 이 세계의 바탕이 되는 원작까지 더듬어가자 희미하게 한 사실이 떠올랐다. 너무 옛날에 접한 이야기들이라 기억 저편에서 아득하게 떠오르는 설정들이었다.
선대 황제가 폭주하는 설인에게 걸었던 적이 있는 마법.
역사적으론 표면상 설인들의 마력을 잠재운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마법사였던 선대 황제가 설인에게 저주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 사실은 극소수의 설인만 알고 있는데, 그게 바로 설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제국을 타도하려는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설인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요. 로위나 카시어스.”
그의 입가에 화사한 웃음꽃이 걸렸다. 독을 품은 화려한 꽃 같은 미소였다.
“당신이 ‘예언자’였어.”
“그게 무슨 소리….”
나는 그의 말에 의아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쳐다보았으나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그 순간,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의 허락에 문이 벌컥 열리며 보좌관이 들어왔다.
저거 내가 열려고 할 땐 안 열렸는데!
“문 고장 안 났네요.”
내가 황당한 얼굴로 황태자를 보자,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미소를 짓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무언가 기쁜 듯한 얼굴이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은 흘긋 나를 보더니, 황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일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보좌관이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한 발 물러나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재판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무슨 말씀인가요?”
재판이라면 분명히 아일라의 재판을 지칭하는 것일 터.
나는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재판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별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열렸다.
“쪽지의 성분이 정확히 음독에 쓰인 독의 성분과 일치했습니다.”
그는 보좌관한테 건네받은 쪽지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필적 조사 결과, 아일라 레니에 양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