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황태자의 말에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빛은 곧이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온몸에 열이 팽팽 돌았다. 뒤늦게 분노가 팽배하게 치밀었다.
“엘렌을 그렇게 만든 게 전하인가요?”
“글쎄요, 내가 그랬을 것 같나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되네요.”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황태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하지만 그가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건 속마음을 읽지 않아도 알았다.
“생각은 자유지만 조금 섭섭하군요. 이번만큼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가 빙긋 눈을 휘며 웃었다.
뻔뻔하고 얄미운 그의 작태에 열이 받았지만, 나는 차분히 생각하도록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요?”
“공녀, 정말로 내가 알렉산드로 대공자를 해하려고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럼 무슨 이유로 그를 해친단 말입니까?”
“그거야…….”
무심결에 ‘통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엘렌은 통찰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던 건 순전히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그의 가족만 그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황태자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사실을 몰랐다면 황태자가 엘렌에게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야, 분명 알고 있어.’
어떻게 알게 되었든지 분명 그는 엘렌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엘렌을 그리 만든 건지도 의문이었다.
마탑주라는 지위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탑도 위신 때문에 엘렌의 상태를 외부에는 비밀로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신문사에 제보하는 바람에 마탑의 내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 알 바야.’
어서 엘렌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게 중요했다. 외부에 알리기 싫다면 적어도 엘렌의 부모님께 알릴 생각은 했어야지. 엘렌이 무섭다고 입을 다무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이해는 가지만.’
모든 행동의 의도가 불분명하지만, 결국 황태자가 황제를 죽이려고 했다면 목적은 뚜렷했다.
황위. 그러나 한 가지, 너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저와 아일라를 이 사건에 연루시킨 이유가 뭔가요?”
“마치 내가 일부러 레니에 영애를 연루시켰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한 가지 잊은 사실이 있습니다. 공녀. 그 와인을 건넨 건 그녀고, 아바마마는 그 와인을 마시고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아까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공녀.”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두운 빛을 띠었다.
“내 말이 곧 진실이라는 것을 그대가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 * *
황태자와 만난 이후, 종일 멍하게 앉아 있는 게 이상했는지, 리카르도가 나를 불렀다.
“오필리아.”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여기선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지적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둥둥 떠다녔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곧바로 다시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나?”
“……지금은 바쁜 것 같아요.”
희멀건 내 얼굴을 잠시 보던 리카르도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시선을 내려 애써 서류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얕은 집중력은 아까의 일로 금방 분산되고 말았다.
‘어떡해야 하지.’
그 제안을 하던 당시, 황태자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일라는 처형될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협박할 줄은.
다시 돌아가도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지,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조사단을 이끌려고 했다면, 충직한 심복을 이 조사단의 단장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나을 터였다.
“휴…….”
머리 아파.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다. 사무실을 나오자, 문 옆에서 수심이 깊은 얼굴로 리카르도가 벽에 기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작님.”
“고민이 많은 얼굴이군.”
“…조사단장이라는 직위가 이렇게 책임이 막중한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카시어스 가문의 명줄까지 내 손에 달렸다는 것이.
그 가문의 존재를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타인에 의해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리카르도에게 잠시 산책을 권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청을 받아들였다. 인적이 드물어지자 리카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상황까진 희미하게나마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게 부질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만약 그랬다면 황태자가 어떤 수를 써서든 막았을 테니까.
“태자 전하께서 왜 저를 이런 조사단의 단장으로 만들었을까요?”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지만 한 가지 정도는 알 수 있지…. ”
“뭔가요?”
“목적 없이 그대를 이곳에 들이진 않았을 거란 거다.”
그 목적을 모르겠지만, 알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 슬슬 알고 싶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 * *
“이 방에 아일라가 있는 거예요?”
알렉스가 눈앞에 있는 문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그는 안도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빨리 아일라의 신변을 확인하고 싶어 했던 그는 노크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일라! 괜찮아요?!”
우당탕!
아일라는 난데없는 방문자에 깜짝 놀라며 읽고 읽던 책을 허둥지둥 치웠다. 내가 준 약초학이었다.
“아, 아무것도 안 봤는데요.”
방문자가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누가 봐도 수상쩍은 얼굴로 변명했다.
“휴우… 아일라. 저와 알렉스예요.”
나는 서둘러 문을 닫고 입을 열었다. 정말 걱정되는군. 저러는데 들키지 않는 게 외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 알렉스?”
알렉스를 발견한 아일라가 깜짝 놀랐다.
“알렉스가 왜 여기에……?”
의아한 얼굴을 하는 그녀에게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일라는 알렉스가 자신을 보러왔다는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손은 괜찮아요?”
오죽 급하게 감추었는지 그녀의 손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묻자 뒤늦게 알렉스가 아일라의 손을 발견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아일라에게 다가갔다.
“제가 노크를 했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알렉스.”
“소, 손 좀. 제가 조금 치료해볼게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저렇게 말하니, 의도가 너무 불순해 보이잖아.
나는 알렉스의 숫기 없는 얼굴에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손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하얀빛에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언제 손이 부어올랐냐는 듯 아일라의 손이 깨끗해졌다.
“와!”
아일라와 나는 나란히 그의 마법에 감탄했다. 알렉스는 갑자기 집중되는 두 시선에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주문 없이 마법을 쓸 수 있었나…?’
내가 아는 마법사라곤 엘렌밖에 없었기에 나한텐 자연스러운 모습이긴 했으나, 엘렌은 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가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초학이라고 적힌 책을 보며 말했다.
“이게 뭐예요?”
“아, 이게…….”
아일라가 나에게 이걸 말해도 되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이 사실까지 알렉스에게 말하기는….
“어라, 이 병은 또 뭐예요?”
“앗!”
아일라가 알렉스의 손에 들린 병을 황급히 빼앗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제 거의 울상인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알렉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 그게 가능해요?”
알렉스는 우리가 몰래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사실보다, 실현 가능성에 놀란 눈치였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묵과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열심히 해볼게요!”
아일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음독 사건 용의자로서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역시 알렉스가 이곳에 들른 것이 그녀에게 꽤 큰 힘이 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이미 나는 그 범인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 이게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알렉스. 병은 어디서 발견한 거예요?”
“여기 창틀에 끼워져 있던데요.”
“아일라, 당분간 병은 내가 갖고 있는 게 낫겠어요.”
“네? 하지만…….”
“괜찮아요. 잠시 보관하는 거니까.”
아일라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사장님, 소식 들었어요. 그 친구분이 혼수상태라고요. 많이 괴짜 같긴 했지만 나쁜 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감이에요.”
아일라의 속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알렉스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그도 눈치가 있었는지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분명 나쁜 분은 아니라는 말에 반박하고 싶은 거겠지. 알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