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잠시간 침묵하고 있던 리카르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전하.”
그는 베로니카 황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폐하의 생사가 달린 중대한 사건이 걸린 일입니다. 이런 일에 검증도 되지 않은 외부인을 데려오라는 말부터 꺼내는 건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외부인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한 당사자가 바로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리카르도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다. 약간 인사청탁을 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맞긴 하지.
사실 황녀가 있어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고민이었으나,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있는 엘렌을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외려 리카르도보다 황녀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며 말하고 있었다.
황녀에게서 미소가 설핏 스쳤다. 오호라, 이것들 보게?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그 말, 아바마마를 위해서 한 건지, 백작 부인을 위해서 한 건지 듣고 싶어졌어.”
“…….”
리카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물론 제가 아니라 폐하를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전하.”
괜히 나와 리카르도를 엮는 듯한 황녀의 말에 나는 그 대신 말하며 슬쩍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인이 아니라 에르도안 공작에게 물었지만, 아무리 공작이 모든 걸 가질 수 있더라도 유부녀를 탐내진 않겠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은 물건이 아닙니다.”
리카르도가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런데 반박 포인트가 무언가 좀 이상했다. 오히려 황녀에게 오해를 살까 싶어 나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 뭐가 아쉬우셔서 절 좋아하시겠어요.”
말하고도 속으로 뜨끔거렸다. 리카르도가 저번에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리카르도의 기분이 왜인지 안 좋아 보였다.
‘왜 저래.’
설마 사실대로 말 안 했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한다면 우리 둘 다 여기서 매장이란다.
그리고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간 거지?
“공작님의 말씀이 맞아요. 함부로 외부인을 조사단에 들일 수는 없죠.”
어쩔 수 없었다. 엘렌의 일이 이 일과 확실히 얽혀 있단 증거도 없었고, 그 상태로 알렉스를 데려오자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섣불렀다.
* * *
“아일라, 몸은 좀 어때요?”
나는 조사라는 명분으로 오늘도 아일라가 있는 빈실에 방문했다.
“저는 괜찮아요, 사장님은요?”
“완전 펄펄해요. 아일라도 저번보단 안색이 괜찮아 보이네요.”
“네, 사장님 덕분이에요.”
아일라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아래 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손엔 내가 주었던 책이 들려 있었다.
“공부는 잘 되어 가요?”
“저는 제 스스로가 공부는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재밌었어요.”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책을 매만지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약초학을 공부하면서 굉장히 흥미를 보였기에 당연한 결과였긴 했다. 인물의 특성 자체는 원작과 똑같은 듯한데, 왜 사건은 이렇게 흘러가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그동안 기사들이나 조사단원들이 몸수색했나요?”
“아니요, 여기 방에 처음 들어올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어요.”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아일라가 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골치가 아픈 일이 될 수도 있다.
방에 들어올 때 몸수색을 했다는 건, 그녀가 이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쪽에서는 파악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책의 존재가 괜한 부스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내가 깜빡 잊고 그 책을 두고 갔다고 변명을 하면 되지만, 취조라는 명분이 의심을 사면 아일라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도는 얼마나 나갔나요?”
그리 두꺼운 두께의 책은 아니지만, 안에 글자들이 워낙 작게 빼곡했고, 전문용어들이 많아서 약초에 관심이 있는 아일라라도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일라가 원작에서 어떤 책으로 공부했었는지까진 나오지 않았기에 별수 없이 나는 가능한 많은 약초가 기록된 책을 위주로 골라온 터였다.
아일라에게 책을 건넨 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아마 이 책의 절반도 습득하기 어려웠을 터.
아일라는 양장본의 책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쓰윽 만지며 내 물음에 답했다.
“지금 4번째 다시 읽고 있어요.”
어려워서 4번을 다시 읽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 책이 초심자에겐 많이 어려운 편이긴 해요. 다음에 다른 책으로 가져올까요?
“아, 여기에 없는 약초가 있는 책이라면 감사히 받을게요.”
“잠시만요, 아일라. 아까 말뜻이 그러면…… 완전히 이 책을 마스터 했다는 뜻인가요?”
“마스터, 라는 말뜻이 뭔가요?”
“완벽히 무언가를 정독하고 학습했다는 뜻이에요.”
아일라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심히 입을 열었다.
“제가 무언가를 완벽하게 학습했다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지만, 이 책 내용에 관해선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외우고 이해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그거 같은데. 나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입을 떡 벌렸다. 그러면 무슨 문제집마냥 4회 독을 했다는 뜻인가?
이게 바로 재능과 관심, 노력의 삼박자가 모두 어우러지면 가능한 일인 모양이다. 조사단장은 내가 아니라 아일라가 되어야 하지 않나, 진지한 생각이 흘렀다. 정작 그런 아일라는 용의자 신세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품에서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
“이게 바로 폐하께서 마신 와인이 담긴 병이에요.”
“그걸 저한테 왜…. 설마, 사장님!”
내가 이 병을 내민 이유를 알아차렸는지 아일라가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아낼 수 있을까요? 이 배합법을.”
“제, 제가 할 수 있을지… 이제 겨우 일주일밖에 공부하지 않았는걸요.”
나는 그 말에 아일라의 앞에 있는 책을 집어 들고 아일라 쪽에선 책 내용이 보이지 않게 펼치며 말했다.
“라넌큘러스(Ranunculus).”
“독성이 강하지만, 잘만 음용하면 관절염이나 구안와사를 호전시킬 수 있는 좋은 풀이에요. 다른 지역에선 황달과 간질에도 쓰인다고 해요.”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나는 책을 바로 덮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일라는 할 수 있어요.”
10년 넘게 약학에 관해 연구한 궁내의들을 제치고 두 달 안에 배합법을 알아낸 게 그녀였다. 분명 책에선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보다 학습력이 강한 아일라를 보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거 하나로 제가 배합법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는….”
아일라는 자신 없다는 듯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할 수 없어도 해내야만 해요.”
나는 아일라의 소극적인 태도를 언제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상황에선 이 일은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그래도…….’
이제 막 약초를 공부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사람한테 음독에 쓰인 배합법을 알아내란 요구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흘렀는지.’
엘렌이 깨어 있다면 훨씬 일이 쉬워졌을 터였다. 그의 통찰로 반란군의 행적을 찾아내 모든 걸 알아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잠깐.’
설마 그것 때문에 엘렌이 저러고 있는 건 아닐까?
가슴이 선득해지는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 제가 어떻게든 알아낼게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하던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그녀가 할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 배합법을 알아내면 제 혐의가 벗겨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둘의 관계성을 아직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급히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배합법을 알아낸다고 한들, 그녀와 반란군 둘 사이에 접점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으니까.
배후를 알아내어 원작의 절차를 밟을 궁리만 하고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었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아일라가 배합법을 알아내면 내부고발로 죄가 참작될 수 있으니까요.”
“…….”
짓지도 않은 죄를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에 입안이 쌉싸름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받았다.
* * *
‘알렉스를 데려와야 해.’
엘렌이 왜 저런 일을 당했는지, 어렴풋이 추측하니 하루라도 빨리 그의 저주를 풀어야 할 성싶었다.
‘그때 가지 말라고 붙잡았어야 했어.’
늘 바람처럼 오다 사라지는 그를 그때만큼은 붙잡아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행위도 없었지만.
왜인지 후회가 되어 생각의 꼬리만 길어졌다.
황궁의 사무실로 걸어가는 길에 누군가가 보였다. 익숙한 갈색 머리였다. 머리가 딱 부스스하고 더부룩한 게 알렉스인데?
그런데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알렉스?”
“어, 사장님!”
정말 알렉스였다. 그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