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단조롭게 내뱉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사무실 안은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깬 건 리카르도였다.
“전하의 말씀이 맞다. 단장으로서 불복하는 단원을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조차 단원을 변호하지 않자 뒤에 서 있던 단원들의 얼굴색은 더욱 핏기가 없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황궁의 조사단에 입단하자마자 퇴출당했다는 소식은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불명예였기 때문이다.
‘리카르도에다가 베로니카 황녀….’
그들의 입단 소식은 기존 단원들에겐 금시초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결정이 내려진 사안이었기에.
만약 알았다면 이런 당돌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괘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 감정에 집중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리저리 저울질을 해보았다. 자신의 임의대로 사건을 조사한 단원을 끌고 가는 쪽과 시간이 들더라도 인력을 바꾸는 쪽.
시간상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지.
그건 확실히 어려운 문제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린 내가 말했다. 내 말에 단원들은 쭈뼛쭈뼛 내 앞에 왔다. 리카르도가 후작령까지 가서 붙잡아온 효과로 기가 확 죽은 상태였다. 나는 그들의 앞에 서류철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도 아니니까 형식적인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얼른 일을 시작하죠.”
*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완전히 업무를 끝낸 것은 아니었으나 첫날부터 열을 올리면 다음 날에 일할 기력을 다 소진해버릴 수도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퇴근해버리네.’
아까 레니에 후작령에 말도 없이 간 단원 중에서 형식적인 사과라도 건넨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서류철을 정리했다.
‘이왕 갔다면 뭐라도 건지고 오지.’
꽤나 자신만만하게 레니에 후작령에 간 사람들치곤 건진 것이 얼마 없었다. 아예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작저에서 아일라와 자신들은 관계가 없다며 선을 긋는 이야기만 듣고 온 듯했다.
“!”
문을 열고 나온 나는 사무실 문 옆에 서 있는 리카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집에 안 가셨어요?”
“그대가 나한테 남으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랬었죠.”
이걸 잊어버렸다는 게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 리카르도는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이 많으니 잊어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래도 내 정체에 관한 일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않은가. 너그러운 그의 대답에 나는 살짝 풀어진 마음으로 말했다.
“많이 기다리게 했다면 미안해요.”
“딱히. 별로 기다리진 않았다.”
나는 그를 보며 그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내 정체에 대해 알더라도 남에게 알리거나, 그걸 빌미로 나를 이용할 사람이 아니라는 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문제에 관한 건 차치하고, 그에게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에 나와 리카르도는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하루 종일 8명이 있던 사무실 공간에 둘만 남자 지나치게 휑한 느낌이었다.
“공작님의 보좌관한테서 대충 사건에 관해 들었어요.”
“그래,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
그가 말하는 수상한 구석이 어디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사건을 직시하지 못했다. 하필 아일라가 황제에게 올린 술에 독이 들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때 황제의 주변엔 귀족들이 많았지. 확실하게 본 건 아니지만, 전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
“공통점이요?”
“황태자 쪽 사람들이었다.”
“……그거 굉장히 찝찝하게 들리네요.”
“연회 때 태자 쪽 사람들이 초대를 많이 받기는 했지만. 우연치고는 석연치 않아.”
“그러면 아일라에게 술을 권한 사람들이 설마…….”
“그것까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생각하는 바가 맞을 거다.”
“……만약 의도를 가지고 그랬던 거라면, 레니에 후작 부인도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겠지. 알고 그런 짓을 했다면 스스로 자멸하려고 하는 행위다.”
“…….”
그의 말대로 레니에 후작은 아일라의 일로 큰 곤경에 처한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딸인 아일라와 한데 엮여 황제의 암살 혐의, 더 나아가 가문이 반역 혐의를 뒤집어쓸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레니에 후작 부인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나는 리카르도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고 물었다.
“그럼 이 일에 태자 전하께서 관여되어 있단 말씀인가요?”
“관련 없다고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대의 행동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 거라고는 말할 수 있지. 그래도 계속 이곳에 있겠나?”
“…….”
그가 말렸던 이유에 이런 게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알고 있는 책의 내용과 지금 리카르도에게 듣는 이야기. 너무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소설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큰 차이가.
그의 말에 따르면 황태자가 배후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건 내가 아는 사실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범인은 반란군이었을 텐데?’
나는 옷 안주머니에 넣은 수첩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범인은 반란군의 부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볼펜으로 써진 글씨가 저절로 움직여서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어요. 그렇다고 손 놓고 아일라가 재판을 받는 걸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아일라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단원들이 조사해 온 바로는 레니에 가문 쪽은 아일라를 아예 가문에서 제적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런 사람들이 아일라를 도와줄 리도 없거니와, 줄곧 가문에만 있던 그녀에게 따로 도와줄 인연은 더욱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한 가운데 그가 어느새 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대의 말대로 다른 방도는 없지. 하지만 오필리아-.”
지나칠 정도로 그와 가까운 거리에 얼굴에 불이 붙은 듯 점점 열이 몰렸다. 그러나 이어 그가 한 말에 얼굴에 몰렸던 열이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사람은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빳빳하게 굳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그는 아일라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원작을 읽으며 모두에게 세웠던 투명한 막 하나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환상에서 깨어나 냉정한 현실이 눈앞에 닥친 기분이기도 했다.
‘이건 소설 따위가 아니야.’
리카르도의 말은 나에게 아일라의 사형을 선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포기하는 소설 따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말씀 하시려면 나가세요.”
나는 검지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 * *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십니다.”
사택으로 돌아온 리카르도를 본 펠릭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기실 리카르도는 늘 창백하고 희멀건 안색이라 일반 사람들은 안색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를 몇 년간 옆에서 보아온 펠릭스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 말에 복도를 걷던 리카르도가 우뚝 섰다. 그리고 돌연 뒤를 돌아 펠릭스에게 말했다.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각하께서, 말입니까?”
집무실로 들어선 리카르도는 겉옷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 고심했다. 펠릭스는 먼저 묻지 않았다.
아침부터 조사단장으로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천거되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황궁으로 향하더니 돌아오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각하께서 누구에게 실수했다고 말하는 건지,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남의 치정문제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펠릭스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무슨 실수를 하셨단 말씀입니까?”
“잘 모르겠군. 하지만 오필리아의 얼굴색이 그렇게까지 차가웠던 적은 처음이다.”
역시, 펠릭스의 예상이 적중했다. 설사 각하께서 누구에게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걸 깊이 생각할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리카르도는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그거에만 몰두하는 타입이었다.
‘하는 수 없지.’
“부인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리카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일라 레니에를 포기하라고 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최악이군요.”
“그렇게 최악인가? 하지만 아일라 레니에는 완전한 타인이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펠릭스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안경을 고쳐 썼다. 각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사람에게 설명하듯 말하기보단 다른 관점의 접근이 필요했다.
“적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는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처지입니다. 포로가 있는 전장은 적군이 가득하죠.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각하께선 병사를 구하러 가지 않으실 겁니까?”
에르도안 공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군신 사이의 인의였다. 특히 에르도안 가문과 북부에 있는 기사들의 사이는 수 세기에 걸친 마물과의 전투에 단단한 결속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카르도에게 적군은 곧 마물이었다.
펠릭스의 말로 완벽히 이해하게 된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와 레니에 영애의 관계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이를테면 군신 관계인 건가. 큰 실수를 했군.”
부인과 영애를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있는 펠릭스는 그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또 설명하려면 반나절이 걸리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